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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Feb 16. 2023

가난과 극빈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저도 음주가 선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지요.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지경의 가난은, 존경하는 선생, 그런 극빈은 죄악입니다. 그저 가난하다면 타고난 고결한 성품을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결단코 그럴 수 없지요. 누군가가 극빈 상태에 이르면, 그를 몽둥이로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 내 버리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모욕을 느끼라고 말입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겁니다.
- 죄와 벌 中




박세니 님은 "가난은 정신병이다"라고 강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아니 이 무슨 사기꾼 같은 소리인가'했다. 그 말의 근거가 궁금해서 박세니 님의 [멘탈을 바꿔야 인생이 바뀝니다]라는 책을 찾아보았다. 미래가 달라지길 바라면서 어제와 똑같은 삶을 사는 건 정신병이라고 했다. 맞다. 그 말에 나도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냥 가난을 말하는 듯하다. 극빈까지는 아니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보면 세 자매는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 노력하고 거짓된 돈과 타협하지 않으려 애쓰며 산다. 애청자 입장에서는 그게 참 대견하고 기특하지만, 현실에서 보면 멍청한 일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주제에 신념은 있어가지고...



가난과 극빈의 경계는 무엇일까? 질문을 던져놓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 그 세 자매뿐 아니라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기만 할 뿐 극빈한 건 아닌 걸까? 극빈과 가난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내린 결론의 극빈은 마음까지 가난한 것이다. 가난에 항복하고 마는 것. 그래서 마음까지도 가난하기로 결심한 것. 최소한의 감사한 무엇조차 떠올리지도 않는 것.



나도 많이 가난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 서러웠고 힘들었던 적은 많았지만 그 때문에 죽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내가 20대 후반일 때, 사촌동생이 고등학생이 되었다. 구정 연휴를 보내며 우리는 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납골당에 갔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 눈을 떴는데, 사촌동생이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후에 나타난 사촌동생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친구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여기서 친구를 만났냐고 니, 그건 아니고 중학교 때 죽은 친구도 이 납골당에 있어서 그 친구도 잠깐 보고 온 거라는 것이다. 친구가 가장 소중할 시기에 친구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까 싶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죽은 그 아이도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촌동생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짧게 말했다.

"자살했어."

사촌동생의 마음을 헤아려 여러 질문을 삼키고 있던 중 사촌동생의 말이 내 입을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아니, 왜? 중학생이 자살을 한 이유가 뭐야?대체?"

앞날이 창창한 10대 소년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가난해서 였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자기네 집은 너무 가난한데 자기는 공부도 못하고 그래서 자기는 평생 이렇게 가난하게 살다 죽게 될 거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느니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너무 충격적이었다.


스스로의 인생에 그런 결정을 내린 죽은 친구도 참 불쌍했지만, 그 이유를 타당하다는 듯 낮은 어조로 말하는 사촌동생도 심하게 걱정이 되었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사촌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가난하고 물려줄 가업도 없고, 자기는 돈도 없고 빽도 없다는 말을 했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나를 덮쳤고 설마하는 마음으로 되물었었다.

"그래서, 너도 정말 심하게 가난하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저번에 우리 집은 가난하다고 했잖아." 동생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그러니까 나 이제부터 공부하려고. 아빠가 능력도 없고 (고모부는 직업군인이셨다) 나한테 물려줄 재산도 없는데 내가 알아서 성공해야지.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얼마 후, 고모가 나에게 연락해서 사촌동생의 수학 과외 지도를 부탁 했다. 당시 그 지역은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안 했던 사촌동생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인수분해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 사촌동생은 첫 학기 중간고사에서 수학 전교 1등을 했다며 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다른 과목들도 다 성적이 좋았다. 그다음 기말고사에서도, 2학년때도 3학년때도 계속 그랬다.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해야 했던 나는 사촌동생을 끝까지 가르치지는 못했다. 사촌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진학하는, 그 고등학교 졸업생 중 몇 안 되는 학생이 되었다. 후에도 자신의 진로를 위해 깊게 고민하고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 예기치 못한 큰 병이 찾아와 내 사촌동생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지만 이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큰 인물이 되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내 사촌동생은 극빈하진 않았던 것이다. 요즘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한다. 스스로 흙수저라고 칭하는 청년들에게 묻고 싶다. 흙수저라는 것은 부모가 나에게 물려주는 것인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인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만큼은 가난하지 않을 수 있는 의지야말로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재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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