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
유비무환. 준비가 되어 있다면 걱정이 없다. 또는 우리끼리는 “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는 농담으로도 쓰인다. 그만큼 마음에 부담이 되는 환자가 있으면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장애 환아들이나, 전혀 협조가 되지 않는 아이들에서는 우식(충치)의 기미라도 보이지 않게 예방치료로 원천 봉쇄를 하게 되는데 그 선봉에 서 있는 치료가 실란트, 일명 홈메우기이다.
치아는 세균들이 모여서 살 수 있는 골짜기들이 많다. 골짜기가 아니면 매일 세 차례 오는 잇솔질 쓰나미에 쓸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갓 태어나 반대쪽 치아와 씹히지 않아 안전하고, 잇솔이 잘 닿지 않는 맨 뒤 어금니는 세균에겐 훌륭한 서식지다. 실제로 큰 어금니 우식은 치아가 올라온 지 1~2년 내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소아치과의사는 이런 골짜기에 특히 신경을 쓴다. 나는 조금만 치아가 올라와도 바로 덮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특히 치료가 어려운 아이들일수록 올라오자마자 당장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혀는 바다뱀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침은 폭풍처럼 쏟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치아를 드릴로 파내고 방습하며 작업하는 것은 마치 폭풍우 속에서 물 한 방울도 닿지 않게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다행히 정부에서도 그 마음을 알아주어 18세 미만의 대구치까지는 모두 보험이 적용된다.
홈메우기의 우식 예방 효과는 60~90%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입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8개 대구치가 모두 홈메우기로 덮여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물론 홈메우기 밑으로 우식이 진행되거나 치료가 떨어질 가능성도 있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오늘 아침에도 한 아이를 꽁꽁 묶고, 서럽게 우는 아이의 입을 억지로 벌려 홈메우기를 했다. 가만히 있으면 5분도 안 걸릴 작업이지만 20분이나 걸렸다. 방습이 잘 안 되어 조금 걱정이 되지만, 효과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위험을 싫어한다. 위험 요소가 있으면 다 메워버리고 싶다. 내 삶 속에도 세균이 아예 자라지 못하게 미리미리 막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