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는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미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젊은 거장 반열에 든 ‘션 베이커’ 감독은 이번에도 미국의 성노동자, 이민자, 중독자, 빈민층을 주인공 삼아 낮은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의 영화에는 유독 포르노 배우, 성소수자, 스트립 댄서를 등장시켜 미국의 민낯을 드러낸다.
전작들의 기시감이 살짝 엿보여 션 베이커의 팬이라면 아는 만큼 보이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와 바람피운 남자친구를 찾아 LA를 활보하는 흑인 트랜스젠더의 상황을 담은 <탠저린>은 <아노라>의 후반부 대환장 발악쇼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디즈니랜드 입장이 소원이던 아이의 바람처럼 주인공 아노라는 신혼여행지로 디즈니랜드를 꿈꾼다. 아노라가 가장 좋아하던 캐릭터가 신데렐라인 점도 흥미롭다. 잿빛투성이의 평범한 여성은 마법의 시간 동안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지만 그 효과는 자정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 관계가 마음을 나누는 과정은 <스타렛>과 닮았다. 사소한 일에서 시작한 일이 손쓸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점입가경은 퇴물이 된 포르노 배우의 현실을 녹여낸 <레드 로켓>을 따라간다. 매 작품마다 소외계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야기, 실존 인물 같은 누군가의 인생을 통째로 옮겨 온 것 같아 현실감이 크다.
꿈같은 일주일 보낸 미국의 신데렐라
뉴욕의 스트립 댄서로 활약 중인 아노라(미키 매디슨)가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을 만나 1만 달러에 일주일 계약 연인이 되길 수락한다. 미국에 휴가 온 이반은 일주일 동안 쾌락을 조건으로 아노라와 동석한다. 갖은 향락과 쾌락에 빠져 놀기 바빴던 계약 마지막 날. 부모 잘 만난 금수저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미국인을 원한다며 돌발적으로 청혼한다.
아노라는 꽤 괜찮은 제안으로 들린다. 찌든 가난을 청산하고 장미빛 미래를 잠시 상상한다. 사랑이 없으면 어떤가 어쨌거나 둘은 합의하에 빠르게 부부가 되길 원하는 목적은 같기 때문이다. 당장 결혼은 해야 하니 가능한 라스베이거스의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뭐가 그리 급한지 속전속결. 패스트푸드를 주문하듯 즉석 결혼을 해치워 버린다.
한편, 동의도 없이 치러진 아들 결혼 소식을 두고만 볼 수 없던 이반의 부모는 미국의 하수인에게 결혼 무효화를 지시한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생각에 들떴던 아노라는 갑자기 들이닥친 하수인 3인방(카렌 카라굴리안, 바체 토브마시얀, 유리 보리소프)과 난장판을 벌이며 저항하지만. 그러는 사이 이반은 신부를 버린 채 줄행랑을 치고야 만다. 할 수 없이 아노라는 하수 3인방과 이반을 찾아 밤거리를 활보하게 된다.
아노라는 허탈하다. 낭만에 빠져 앞뒤 따지지 않고 충동적으로 결혼까지 했지만 도망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모님을 향한 치기 어린 반항의 연장선에 휘말려 버린 아노라는 끝까지 결혼을 유지하려 발악의 끝을 달린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예정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치 자정이 다가오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신데렐라의 마법처럼 낭만은 끝났고 현실은 암담하다.
소외계층을 향한 꾸준한 관심
영화는 21세기 새롭게 해석한 신데렐라 스토리라 할만하다. 결혼으로 단번에 신분 상승이란 허황된 꿈에 젖은 여성의 관점을 따라가면 <귀여운 여인>이 떠오른다. 디즈니랜드 근처에 살지만 한 번도 가본적 없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의 성장통 같아 찡한 마음이 커진다. 여러모로 현실의 벽에 부딪힌 아노라가 애처롭고 안타깝다
‘아노라(Anora)’는 우즈베키스탄 이름 대신 미국 이름 애니로 불리길 원한다. 밤에는 생계를 위해 누구보다 화려하게 반짝이지만 낮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푸석한 무표정을 갈아끼운 상황과 비교된다. 영화 내내 손님 비위를 맞추며 낯 뜨거운 장면이 이어지나, 건조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직장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처럼 엄연한 직업으로 존중받길 원하는 성노동자의 얼굴이 강하게 각인된다.
아노라의 뜻은 빛, 고귀함, 아름다움 등 뜻을 지니지만. 현재는 생계가 급급하다. 불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인생은 언제나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는 듯 화려하게 반짝여 대조를 이룬다. 영화 내내 갖은 멸시와 환멸을 겪던 아노라는 꿋꿋하게 버텨내며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당당한 일로서 생계를 꾸리는 게 존엄성을 지키는 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션 베이커의 영화답게 성노동자의 노동이 휘발되고 폄하되지 않게 그려냈다.
빛나는 배우 발굴 선구안
작품마다 새로운 얼굴을 찾았던 션 베이커의 선구안은 이번에도 빛났다. 아노라 역의 미키 매디슨은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표정과 말투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스트립 댄서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린 연기 톤은 21세기 신데렐라의 비극에 어울리는 얼굴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스크림>에서 강렬한 비명으로 인상을 남겨 캐릭터 개발에 힘을 보탰다.
또한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한 하수인 3인방 중 토로스 역의 카렌 카라굴리안은 실망시키지 않고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2000년 <포 레터 워즈> 이후 함께 직접 해왔다. 실제 브루클린 출신의 러시아계 미국인과 결혼한 사연에 영감받아 <아노라>를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아노라>는 카렌 카라굴리안에게 바치는 러브레터일지도 모를 일이다.
국내에 <6번 칸>,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로 이름을 알린 유리 보리소프는 하수인 3인방 중 이고르를 맡았다. 아노라의 굴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눈빛으로 위로하는 감정연기가 심금을 울린다. 강렬한 외모와 달리 속 깊은 정과 순수함을 겸비한 캐릭터를 인간미 넘치는 역할로 승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