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가족>은 살기 바빠 잊고 지낸 가족의 존재를 상기하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기 좋은 영화다. 양우석 감독은 빠르게 변한 가족관을 담고 싶었다며 대가족의 뜻은 ‘대’가 大가 아닌 ‘대하여’의 對라고 밝혔다. 따라서 영제도 ‘About Family’다.
2010년부터 준비한 시나리오는 <강철비> 이후 코미디 영화를 하고 싶다는 바람이 이루어진 휴먼 코미디 장르다. 무게감을 덜어 낸 듯 보이나 여전히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든 장기를 뭉근하게 녹여 냈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 속 핏줄만이 최고라는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바뀌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가족의 정의는 빠르게 변하며 한 가지로 고정되지 않고 흘러가는 유동성을 담았다. 세상에 영원불멸한 게 없는 것처럼 사람 사는 세상을 좀 더 유순하게 살기 위한 지혜같이 보인다. 따라서 가족의 정의를 내리는 정답보다 각자의 가치관에 맞게 생각해 볼 질문을 던지는 형태다. 세대 간 충동을 전 세대가 공감할 가족애로 적절히 풀어낸 성과다.
그 중심에는 ‘정자기증’이라는 장치가 있다. 출가 전 촉망받는 의대생이었던 문석은 믿을만한 유전자를 가진 탓에 여러 번 정자를 기증했고 태어난 자식만 400여 명이 된다는 설정이다. 물론 영화적 허용으로 봐줄 만한 사례지만. 1980년에 일어난 엄청난 수의 정자 기증 사례에 덧입혀 쓴 가짜 같은 실화다. 따라서 20세기와 21세기 사이인 2000년이 배경을 통해 충분히 상상해 봄직한 이야기다.
가부장적 시대 가족의 의미는 구성원 개인 보다 전체의 뜻이 중요했으나, 현재의 가족관은 구성원 사이에서 개인의 가치도 중요하다는 데 있다. 무옥, 문석, 민국, 민선 3대가 각자 다른 이유로 가족을 받아들였지만. 결국에는 이해하고 응원하는 마음인 ‘사랑’이 중심이라는 점은 같기 때문이다.
출가한 외아들의 자식이라 주장하는 남매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된 문석(이승기)의 아이라 주장하는 민국(김시우), 민선(윤채나) 남매가 갑자기 등장한다. 차기 주지 스님으로 촉망받던 불교계의 슈퍼스타 문석의 업보인 걸까. 의대생 시절 연인이던 가연(강한나)과의 복잡한 문제(?)로 얽힌 해프닝인 줄 알았으나, 더욱 다사다난한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된다.
한편, 함씨 집안 대가 끊어져 근심이었던 무옥(김윤석)은 졸지에 손주를 둘씩이나 얻어 즐겁다. 제사를 모시는 종손이지만 조상 볼 낯이 안선 무옥이 살아생전 못 들을 것 같았던 ‘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 때 홀로 살아남아 가난과 싸우며 자수성가한 유명 노포의 사장이자 자산가였다. 자신을 위해 1원도 쓸 줄 모르는 수전노였으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가 원하는 거면 앞뒤 가리지 않고 과소비에 열 올린다. 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잠시.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법적 문제가 불거지자 극단의 선택을 벌이며 충격적인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
大가족이 아닌 對가족
영화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의미를 톺아본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만이 가족의 모습일지 묻는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조립식 가족>은 각자의 아픈 사연으로 함께 하게 된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그려 호평받았다. 가족의 중심이 된 아빠의 칼국숫집을 토대로 매일 끼니를 나누며 정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로를 사랑하고 안정된 믿음이 단단한 구성원은 식사를 통해 사랑을 나눠간다.
시리즈 <가족계획>도 혈연 중심의 가족이 아니다. 특수 교육대라는 의문의 단체에서 탈출한 다섯 인물이 도시에서 일어난 범죄를 응징하며 어제보다 오늘 더 가족 같아지는 희망을 키워가는 이야기다. 햇반과 시리얼뿐인 부실한 끼니일지라도 매번 식탁에 둘러앉아 한 끼를 비워내는 가족의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공통점은 ‘음식’이다. 음식만큼 가족애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도 없을 것이다. <변호인>의 국밥, <강철비>의 비빔국수 등 꾸준히 정체성과 음식을 연결해 나간 양우석 감독은 신작 <대가족>에서도 맛있는 만두로 마음을 움직인다. 낯선 관계 속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짧은 시간 친해지는 건 밥 한 끼를 함께 하는 경험이다. 오죽하면 한국인의 인사의 첫 마디는 ‘밥 먹었어?’일까. 이처럼 미디어 속 가족의 모습은 분명 변화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집에 모여 사는 집단이라는 ‘가족(家族)’의 표면적인 뜻 보다, 한 지붕 아래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식구(食口)의 뜻이 가깝게 떠오른다.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어졌더라도 남보다 못한 관계도 가족이란 두 글자의 양면성이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막상 끊어내지도, 품에 끌어안기도 버거운 게 가족의 울타리이자 결계인 거다. 때문에 음식을 같이 먹은 시간을 추억으로 공유한 사람들, 같이 살지 않아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가족이지 않을까 싶다. 따뜻한 음식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위로 그 자체가 되어주니 말이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마치 운명처럼 <대가족>은 한 해를 정리하고 가족, 친구, 연인 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기대에 부푼 대한민국 국민을 위로하게 되었다. 어지러운 시국과 어수선한 연말 분위기에 무해한 따스함을 얻어 가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각자의 성장과 화해, 건강한 웃음이 반겨주는 일상의 소중함을 전달하기 충분하다. 추운 겨울 뜨끈한 만둣국 한 그릇으로 속을 채운 든든함이 커진다.
참고로 AI 기술이 적용되어 자연스러운 모습이 연출되었다. 이승기의 후반부 나이 든 모습은 분장이 아닌 AI 기술을 입혀 노년의 문석을 완성했다. 또한 하차한 오영수 대신 이순재가 연기한 노(老) 스님은 건강과 스케줄로 힘들어 AI로 대신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