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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스틸 히어> 계엄령의 기억을 품은 여성

by 장혜령

<아임 스틸 히어>는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각본상,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 장편영화상, 같은 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페르난다 토레스가 브라질 최초 여우주연상(드라마 부분)을 받았다. 영화 <중앙역>(1999),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 등을 연출한 거장 월터 살레스의 10년 만의 신작이다.


브라질의 군사 정부 시절 일어난 강제 실종의 피해 가족 실화로 40년이나 지나 출간된 마르셀루 파이바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다. 월터 살레스 감독은 영화 초반처럼 해변가 집을 드나들던 파이바 가(家)의 손님 중 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마치 운명처럼 사적 경험을 역사로 승화했다.


군부독재로 파탄 난 가족


오프닝은 사랑이 가득하다. 1970년을 배경으로 부르주아 가족의 단란한 한때를 보여준다.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가족은 5남매 중 첫째의 영국 유학을 앞둔 파티로 들떠있었다. 하지만 전 국회의원이었던 루벤스 파이바(셀튼 멜로)가 강제로 체포되면서 전반적인 톤이 달라진다.


지옥 같은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내 유니스(페르난다 토레스)와 15살 딸이 연행된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 끌려가 반복적인 조사를 받는다. 얼마쯤 지났을까. 열흘이 조금 넘어 극적으로 집에 돌아온 유니스는 만감이 교차한다. 다행히 딸은 돌아와있었지만 가족은 풍비박산 나버렸다. 루벤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디로 끌려가는지,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자 점차 지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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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는 절망한 채 쓰러질 수 없었다. 남편의 소식을 듣고자 고군분투했으나 정보는 없었고, 정부는 가짜 뉴스를 퍼트렸다. 생사 확인조차 불가, 체포 사실조차 없던 일로 치부되었으며 이를 항변할 사법 시스템은 먹통이 되었다. 집 밖에는 늘 사복 경찰의 감시가 이루어졌고, 도청도 피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명의의 계좌까지 묶여 생계가 시급했다. 급하게 집을 팔고 본가 상파울루로 이사해야만 했다.


이후 남편 대신 가장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40대에 법대에 진학해 인권 변호사가 되어 5남매를 키워냈다. 굳건한 유니스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루벤스의 말은 결국 유언이 되어 돌아왔다.


아내, 엄마, 여성 제2의 인생


<아임 스틸 히어>는 어두웠던 군부독재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기억의 영화다. 가장의 부재로 무너진 가족을 재건한 한 여성의 투쟁기이자 성장 스토리로 해석해 볼 수 있다. 30년 가까이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던 아내이자 엄마는 진실을 위해 투쟁했으나 유니스가 펼친 사회운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는 그녀의 행적을 기록하는데 할애한다. 역사적 진실을 한 가족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다루며 깊은 울림을 전한다.


기다림을 연료 삼아 삶을 살아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유니스는 25년간 브라질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브라질 연방 헌법을 제정한 제헌의회에서 자문 위원으로 활동해 오며 강제 실종 희생자 기록 공개 캠페인과 사망자 인정 법률 제정에도 앞장섰다. 80년대부터는 브라질 원주민 권리와 아마존 보존에 힘쓰며 사회적인 성공도 누렸다.


브라질 정부는 올해 1월, 민주주의 체제의 보존, 복원, 강화에 공헌한 개인을 표창하는 ‘유니스 파이바상’을 제정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유니스에게 사후 ‘히우 브랑쿠 훈장’을 수여했으며, 아카데미 수상 공을 치하하며 ‘유니스 파이바 기념우표’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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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브라질의 군독재 정권은 법이었다. 불법 체포, 납치, 구금, 강제 연행, 고문 등을 벌였다.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끌려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강제 실종과 암매장을 당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구성원과 남겨진 가족의 슬픔과 아픔은 계속되었다.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기록이자 미래를 향한 한걸음 중 하나가 영화라는 기록매체인 셈이다. 영화 속 파이바 가족은 기록하고 모으는 행위를 반복하며 잊지 않는다. 결국 편지, 사진, 영상으로 남겨진 역사는 개인의 서사를 넘어 브라질의 역사로 남았다.


가족의 행복한 추억이 담긴 집을 떠나는 장면은 브라질 국민 슬픔의 메타포가 된다. 파이바 가족의 집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억압의 시대 진정한 자유의 공간이자 유토피아로 상징된다. 하지만 누구나 드나들었던 집이 한순간에 감옥 같은 공간이 되고, 결국은 쫓겨나게 된다. 파이바 가족은 새 집을 짓어 이사할 날을 꿈꿨지만 루벤스의 실종으로 끝내 이루지 못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군사 정권의 탄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한 기다림과 투쟁의 진정한 승자는 유니스다. 절망과 슬픔이 가득할 때 웃음으로 화답한 강단과 선함은 브라질을 넘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오랜 투쟁 끝에 1996년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남편의 사망 증명서를 부여받았고, 2012년에는 살해 증거인 DOI-Codi 부서 입소 확인 서류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와 현실의 무경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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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 유니스 파이바와 배우 페르난다 토레스의 평행이론도 흥미롭다. 두 여성의 꺾을 수 없는 의지는 세상의 변화에 당당히 맞선 성공기 자체다. 먼저 페르난다 토레스는 브라질의 국민 시트콤 크루다. 오랫동안 코믹 연기로 얻은 이미지가 컸다. 월터 살레스 감독에게 제안받아 역사적 인물을 연기하는 데 있어 부담이 컸다.

자칫하면 희화화될 수 있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루벤스 사건의 한복판에 뛰어들어야 했고 16살이나 어린 실존 인물을 소화해낼지도 불투명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개인의 기우와는 달리 변신에 성공하며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었다. 인생의 격변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유니스처럼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흥미로운 점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노년의 유니스는 페르난다 토레스의 어머니이자 연극계 거장 페르난다 몬테네그로라는 것이다. 어머니 또한 25년 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었고 그 자리에 딸이 서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과거 브라질은 대한민국 역사와 공통점이 있다. 실제와 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잊지 못할 기억을 공유한다. 브라질은 1964년부터 1985년까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 정권이 독재하던 어두운 역사를 겪었다. 작년 12월 계엄령이 선포된 우리나라의 상황이 반영된 제목 <계엄령의 기억>으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소개되기도 했다. 원제는 Ainda Estou Aqui(아인다 에스투 아키), 영제 I’m Still Here (아임 스틸 히어)와 같다. 엔딩크레딧에는 파이바 가족의 사진이 수록되어 먹먹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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