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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장cine 수다

<부고니아> 사장님을 납치한 직원의 놀라운 계획

by 장혜령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부고니아>는 22년 전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2000년 대 초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으로 ‘시대를 잘못 태어난 저주받은 걸작’이란 타이틀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영화다. 지구 멸망의 음모론을 믿는 병구(신하균)가 외계인이라 믿는 강만식 사장(백윤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다뤘다.


<부고니아>는 지구의 생명체 중 하나인 인간이 문명을 만들면서 소모하고 파괴한 자연의 혹독한 대가를 치를지 모르는 운명의 날을 향해간다. 외계인의 지구 침공설을 믿는 테디(제시 플레먼스)와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이 지구를 파괴하려는 외계인이라 생각하는 대기업 CEO 미셸(엠마 스톤)을 납치해 벌이는 이야기다.

원작의 부름에 수신한 리메이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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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로그 라인은 같지만 바다 건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손에서 재창조된 영화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더해 무거워졌다. 꾸준히 신화와의 연결성을 더하고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녹여 온 감독답다.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을 통해 기후변화의 원인을 직설적으로 가리킨다.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생겨난다는 고대의 잘못된 믿음을 뜻하는 부고니아의 상징성은 신성한 존재로 믿었던 벌이 생명의 재생, 정화, 풍요로 귀결되며 지구를 지켜야 할 이유를 더한다.


극 중 양봉을 하는 테디는 벌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벌집 군집 붕괴 현상(CCD)이 외계인들의 지구 침공의 대표 징후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현대사회 기업 윤리로 대표되는 ESG 경영방식과도 연결되어 있다. 성공한 CEO 미셸은 겉으로는 직원들의 워라밸을 권장하며 기후변화에도 신경 쓰는 모범 기업으로 꾸며져 있다. 하지만 사실상 외모를 가꾸고 허영만 가득한 CEO다. 겉만 화려할 뿐 무슨 일을 하는지 분명치 않은 회사를 미셸로 인격화했다.


반면 물류 노동자인 테디와 사회 적응이 쉽지 않아 보이는 돈은 음모론에 취해있다. 가정의 아픔을 기업, 사회, 나아가 외계인으로 돌린 결과다. 마치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극단주의자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에만 매진하는 순수하고 절박함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두 남성의 광적인 집착은 이후 영웅적 서사로까지 읽힌다. 개기월식이 다가오기 전 안드로메다 황제와 교신을 꿈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셸을 고문하고 괴롭힌다. 종국에는 자신까지 믿지 못해 실수를 반복한다.


결국 영화는 지구 종말은 외계인 침공이 아닌 어리석은 인류의 자멸이란 메시지를 전달한다. 기회를 주었으나 같은 선택을 반복하고 이기적인 유전자로 진화한 인류에게 자비는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들아 이러다가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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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사회는 수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진실과 거짓 여부를 판단할 지혜를 흐리고 호도한다. 인터넷 하나로 전 세계와 연결되는 사회이지만 가짜 뉴스가 판치고 본질은 감춰져있다. 진실을 걸러낼 장치는 단단한 내면과 사고방식이다. 사회와 단절되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두 남성은 뒤틀린 시각을 지닌 인간 본성을 상징한다. 감독 특유의 냉소적인 시각이 투영된 결말이다. 원작은 자비 없이 지구를 통째로 날려버렸지만, 리메이크 버전은 그나마 인류만 제거함으로 지구를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몇 해 전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봉쇄되었을 때 자정능력을 발휘한 지구가 잠시나마 깨끗해졌던 적이 떠오른다. 현시대와 같은 무분별한 파괴와 인류 간의 혐오는 영화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키치한 원작 보다 중화된 시선은 조금 더 유순해진 것 같지만 인류 전체의 자폭이란 명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인류가 계속된다면 지구에서의 유효 기한은 정해져있다는 풍자적 시각은 여전히 날카롭다.

한편, 영화를 더 재미있게 즐기려면 원작을 모른 채 봐야 한다. 한국영화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중에서 완성도가 가장 높다. 다만 원작을 알았던 만큼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방주사를 맞았으니 충격과 신선함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주요 인물의 성별이 바뀌면서 더해진 설정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다웠다. 그의 영화 중 기괴함과 잔인함은 덜어내고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엠마 스톤과 5번째 협업을 펼친 감독의 재능과 배우의 연기력이 유감없이 펼쳐진다. 여전히 그의 신작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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