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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장cine 수다

<국보> 피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은 판 남자

by 장혜령

영화 <국보>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악인>, <분노>에 이어 이상일 감독의 손끝에서 영상화된 세 번째 작품이다. <악인>이 살인으로 촉발된 인간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분노>에서는 믿음과 불신으로 인한 다양한 딜레마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었다. <국보>는 가부키 공연 중 여성 배역(온나가타)을 맡은 예술 장인의 일생을 다룬 이야기로 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기염을 토했다.


<국보>는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일, 얻은 것과 잃은 것, 서로 다른 혈통을 타고난 인물의 괴로움과 외부인의 고뇌가 펼쳐진다. 경쟁과 성장이란 불가분의 관계를 화려한 가부키 극 속에 녹여 냈다. 일본의 전통 예술을 영화화했다는 어려움 보다 예술의 경지를 집약한 이상일 감독의 마스터 피스라 할만하다.


그래서일까. 일본에서는 <춤추는 대수사선 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의 흥행 기록을 22년 만에 역전했다. 애니메이션 강국인 일본에서 실사 영화가 흥행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역대 박스오피스 1위부터 10위권까지 놓고보면 <타이타닉>,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같이 실사영화는 외화뿐이다. 이상일 감독은 천만 관객 동원의 이유를 두고 "가부키는 일본인들도 자주 볼 수 있는 공연이 아니다. 3시간의 러닝타임도 진입장벽이다"며 상상도 못 한 일이라고 전한 바 있다.


일본 실사 천만의 흥행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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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관객의 마음을 훔쳤는지 분석해 보자. 첫째로 이상일 감독이 주목한 주제는 ‘인간이 짊어진 업’이다. 예술의 경지를 넘어 최고가 되려는 집념은 나라와 세대를 넘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떠오른다. 남성이 여성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제약 혹은 마법 같은 아름다움이 영화라는 매체에 각인되었다.


<국보>는 일본 가부키의 세계를 집중탐구하며 한 남자의 일생을 훑는다. 야쿠자 집안에서 태어난 키쿠오(요시자와 료)는 멸문 집안을 뒤로하고, 가부키 명문 가문의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눈에 띄어 가부키를 배운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하나이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와 호형호제하며 연습에 매진해 두각을 보인다.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키쿠오는 가문의 후계자인 슌스케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성장한다. 하지만 세습 제도가 강한 가부키 세계에서 키쿠오의 재능은 때때로 좌절되고 만다. 경쟁으로 비롯되었지만 넘어설 수 없는 출신을 확인한 질투는 배신으로 이어지고 집념은 광기로 변질된다. 천재의 재능과 적자의 혈통은 사사건건 대립하며, 서로에게 결핍을 좇는 자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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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마치 키쿠오가 겪은 인생이 이상일 감독의 삶과 오버랩되는 기시감이다. 일본 전통극을 자이니치 3세인 이상일 감독이 맡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경계인의 삶을 겪어 왔다. 영화감독으로 성공해 일본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제78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공식 출품에 이어 제9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일본 대표 출품작으로 선정되었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열정과 노력, 피 끓는 자기검열은 키쿠오의 삶의 목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키쿠오를 연기한 요시자와 료는 1년 반 동안 가부키는 연습하며 인물의 감정에 따른 춤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가부키 공연을 보는 것 같지만, 가부키 배우를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의 진면목을 목격하는 호사다. 올해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배뱀배뱀뱀뱀파이어>의 병맛 코미디와 상반된 모습으로 등장해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로 인정받는데 일조했다.


마지막으로 이상일 감독의 눈은 탁월했다. 촬영감독을 외국인으로 두어 철저한 제3자의 시선으로 담았다. 이상일 감독과 <파친코 2>에서 협업한 세계적인 촬영감독 소피안 엘 파니를 통해 위험하고 잔혹한 가부키의 세계를 탐닉한다. 공연의 재현을 넘어선 예술적 혼을 시네마틱한 공간에 채워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듯 현장감이 크다. 영화 속 여러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한 활동성을 보인다. 137분이란 긴 러닝타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다. 가부키 공연과 예술인의 일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국보>의 흥행은 무너진 한국 영화의 위상에 뼈아픈 결과를 곱씹게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판소리를 소재로 천만 관객을 모은 것과 같다. TV 시리즈에서 파생되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 순수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정통 시네마다. 이제는 현상이라 불리는 애니메이션도 아니기 때문에 의미있는 결과다.


이상일 감독은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해 보며 관객이 즐거워야 할 이유는 찾아야 한다”며 무엇보다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이야기의 힘, 배우의 연기, 소름 돋는 예술적 볼거리의 시너지는 통했다. 숏폼이 지배하는 도파민 시대에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극장을 찾게 할 요소, 한국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여성 국극을 소재로 만든 드라마 <정년이>의 열풍처럼 사라져 간 우리 문화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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