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 대한 별것 없는 단상
나이 서른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된 때는 스물넷이었다. 멋모르고 들어간 신문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서른을 앞둔 선배로부터 “난 나의 서른이 너무 기대돼”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후였다.
23살, 초짜 인턴으로 들어간 신문사의 사정은 암담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해 언론인으로서의 신념을 가슴에 새기고 있던 터라 지역 신문사의 민낯을 마주하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당장 경력 1년만 채우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근근이 출근했지만, 한편으로는 젊어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여유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건강한 신체, 파릇한 노동력이 있는데 어디든 못 가랴! 내 젊음에서 우러져 나오는 자신감을 믿었다.
선배는 내게 인간의 다양성을 깨닫게 해 준 인물이다. 사회부 기자였던 그는 깡말랐으며 늘 예민해 보였다. 그의 온몸에서 돋아 나오는 가시가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한마디로 무서웠다. 그래서 편집국에 나타날 때면 늘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후배의 잘못은 굳이 그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가차 없이 지적했다. 상사에게 바락바락 대들 만큼 전투력도 최고치였다. 무섭기도 했지만 따뜻하기도 했다. 야근하는 후배가 있을 땐 선배가 되어서 어찌 너를 혼자 두고 가겠냐며 옆을 지켰다. 무심코 내뱉은 말들에는 약자를 위한 배려가 스며있었다. 나는 힘들 때마다 선배를 찾는 후배가 되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서른이 너무 기대된다고 했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떻게, 얼마나 커리어를 쌓았을지 너무 궁금하단다. 그 말을 듣는 스물넷의 나는 서른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 공포감보단 기대감이 은연히 마음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내 세상이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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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장마철에 수확한 복숭아를 먹을 땐 늘 아쉽다. 풋풋한 향이 나는 과육은 덜 익었다. 한입 깨물면 아무 맛이 나지 않는 땅땅한 분홍색 덩어리,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킁킁대야 겨우 맡아지는 어렴풋한 향기, 내 손목을 어설프게 자극하는 까슬한 껍질, 한 입 깨물어 씹으면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밍밍한 과육… 맛이 들려던 찰나 수확된 복숭아는 여름 과일에게 기대하는 달콤함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20대가 이런 건가 싶다가도 30대가 된 나는 늘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은 채 아직도 익어가는 중임을 깨닫는다. 서른이 되면 누군가로부터 어른 자격증을 받을 줄 알았는데 결국 어른이 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앞자리 3을 맞이한 내게 일어난 마음의 변화를 나열하자면 성나는 일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볼 줄 알게 됐다. 한결 차분해졌지만, 화가 쌓이면 댐 터지듯 무너진다. 그래서 남의 일에는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다. 근데 눈물이 많아졌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는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게 부단히 노력한다. 사랑의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남에게 못되게 구는 어른을 보면 반면교사로 삼는다. 나는 도덕적으로 살고 싶다.
비로소 어른의 기준이 보인다.
스물여덟, 새해를 맞이하기 전 12월 31일. 땅에 닿으면 푸스스 녹을 것 같은 첫눈이 퐁퐁 내린 날, 나는 이자카야에 앉아 친구와 함께 새해 이루고 싶은 소망을 이야기했다. 그날의 화두는 ‘어른’이었다. 꼭 멋진 어른이 되자고 약속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 어른을 선망한다. 결론은 뭐?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