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 - '미친 짓' 이란 표현만으로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결혼 생활의 난이도는 가히 게임의 '끝판왕'에 비견된다. 좀처럼 이길 수 없을 것 같고 실제 매번 지고 만다. 게임을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도 없고, 쉬운 스테이지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언제나 끝판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지고 또 지고, 빌어먹을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게임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도무지 쉬운 결혼 생활이란 게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 의문에 휩싸인다. 원만히 이겨내는 사람이 이상해 보일 정도다. 실제 수많은 기혼자들이 이겨내지 못한 패배감에 좌절하고 괴로워한다.
우연히 노아 바움뱀의 영화 <결혼 이야기>를 봤다. 사전 정보 없이, ‘이야기’라는 어감이 주는 흥미롭고 뭔가 재미있는 게 있을 것 같은 선입견에 속아서 본 영화는, ‘결혼 잔혹사’였다.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 덕에 더욱 몰입되어 두 부부의 고통을 온전히 느껴야했다. 난 그냥 행복한 영화를 보고 싶었단 말이다.
결혼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이혼한 부부가 싸우고 상처받고 힘들어하다, 나아가 후회하고 다시 상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매우 핍진하게 그려낸다. 감독이 변태가 아니고서 이렇게까지 그려낼 일인가?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면 어쩌란 말인가? 빌어먹을 이 힘든 걸 나만할 수는 없단 말이다.
비단 결혼 뿐 아니라 사랑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나 뜨거운 핑크일 수만은 없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절정에 다다르면 식기 마련이다. 물론 식어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식은 사랑'의 피해자가 되는 것도 가해자가 되는 것도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우린 언제나 가해자고 동시에 피해자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오후의 이자벨』에는 기묘한 사랑을 하는 남녀가 나온다. 이자벨에게 첫눈에 반한 샘은 평생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다. 그럼에도 남자의 사랑은 좀처럼 멈추지 않고(물론 이자벨 역시 멈출 마음이 없다) 불완전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정에 다다르지 못한 둘의 사랑은 애틋함과 간절함이 동력이 되어 막장으로 치닫는다. 그렇게 불륜에 불륜에 불륜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묘사 또한 적나라하다. 심지어 '믿을 수 없는 화자'의 거짓부렁이 아니고서야 중년 남자가 이렇게 수많은 여자와 사랑을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고, 모든 것이 주인공의 꿈이 아닐까 의심할 지경에 이른다. 아무래도 중년 작가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탈의 욕망을 소설로 표현한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서 잘 읽히기는 한다.
"그래 아주 갈 때 까지 가는 구나. 어디까지 가는지 좀 보자."
어쨌든, 망가진 결혼과 불륜, 다시 망가진 불륜과 이혼, 죽음과 허무가 어지럽게 펼쳐지는 소설은 사는 건 이토록 힘겹고 복잡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와 소설을 마치고나면 세상에 내 인생처럼 평이한 인생은 없구나, 안도하게 되는데, 작가는 이럴 의도였던 것이냐?
그럼에도 세상의 수많은 커플들은 오늘 또 결혼을 한다.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라면 좋은 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해피엔딩을 바라는 건 어렵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