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대전환기 속 '인문학의 쓸모'에 대해 고민해 봅시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분명 인간일 겁니다.
당신이 키우는 고양이나 강아지가 우연히 이 글을 시야에 두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글을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이죠. 아니면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chat GPT처럼 뛰어난 인공지능이 이 글을 읽고 있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예측하자면, 당신은 오늘도 마음의 양식을 쌓아보자는 생각으로 브런치를 열어 보셨을 거예요. 그리고 평소 구독하던 작가님의 글을 보며 ‘역시 이 작가분의 글은 훌륭하네... 많은 도움이 되었어.’ 하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러다가 좀 새로운 작가의 글을 찾아보기 위해 스크롤을 내리던 당신은 우연히 이 글을 마주했어요. 그리고 이 듣도보도 못한 초짜 작가가 뭐라고 할지 호기심이 생겼고, 결국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비밀리에 개발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아는 인공지능 중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녀석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분명 인간입니다! 제 말이 맞죠?
당연한 이야기로 지면을 낭비한 것 같지만, 저는 브런치 작가 활동을 시작하며 당신이 한 명의 ‘인간’임을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으로 함께 읽어갈 글들은, 그리고 함께 진행할 사유의 과정은 모두 ‘인간’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이죠. 이쯤에서 제 소개를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저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자 인문학의 쓸모를 시장을 통해 증명하고자 노력하는 예비창업자 앙트필입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저는 글을 통해, 당신의 일상에 ‘인문학적 사유’를 더하는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을 설득해야겠지요?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저와 함께하고 싶지 않으신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그런데, 부디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제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이 절절한 구애의 글을 한번만 읽어주세요! 나가기에서 손 떼셨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저는 우선 ‘인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인지부터 천천히 설명해보려 합니다.
인문학의 ‘인문人文’을 있는 글자대로 해석하면 ‘人’ (사람 인) 자에 ‘文’(글월 문) 즉, ‘인간이 남긴 글’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에 관련한 흥미로운 해석을 하나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서울대 인문학 연구소의 김헌 교수님께서는 유튜브 채널 eo에서 진행한 인터뷰(https://www.youtube.com/watch?v=SJNpJfPOuA4)에서 人‘文’의 ‘文’(글월 문)을 글이 아닌 ‘무늬’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즉, 글뿐만 아니라 인간이 남긴 사유와 행동의 발자국 모두가 곧 ‘인문’이라고 이야기하신 것이죠. 저는 김헌 교수님의 이러한 해석에 동의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문이란 우리의 ‘일상’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이란 그러한 인간의 일상이 남긴 모든 무늬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지적 토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면 인문학의 범주는 엄청나게 커집니다. 우리가 소위 인문학이라 칭하는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 이외에도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곧 인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학문의 성과와 고민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의 일상 속에 녹아든다면 이는 곧 인문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함께 나눌 이야기는 모두 ‘인간’인 저와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저는 기술의 발전에 대해, 고대 그리스의 어떤 철학자의 사상에 대해,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문학과 예술작품들에 대해, 사회적 이슈에 대한 글을 쓰겠지만, 그 글을 읽을 당신도, 이야기를 풀어갈 저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글의 소재가 되는 모든 지식도, 그 글을 통해 당신이 얻어갈 인사이트도 모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지적 토대입니다. 즉 ‘인문학’이죠.
그러한 의미에서 인문, 그리고 인문학의 가치가 존중받지 않는 사회는 분명 좋은 사회가 아닐 것입니다. *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인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없다면 그 어떤 혁신적인 정책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혁신적인 기술이 세상에 등장하더라도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인간에게 이로울까’라는 고민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 기술의 혜택은 여러분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앉아 계신 의자 하나를 만드는 과정에도 그 의자에 앉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들어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 스스로가 인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기계장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기계장치는 행복을 느낄 수 없겠지요. 따라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는 인문학의 가치가 존중받아야 합니다. 특히 전쟁, 기후위기, 생성형 AI와 같은 신기술의 범람 등 그야말로 대전환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 인문학을 통해 인간성을 재구성하는 사회적 노력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습니다.
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아주 뻔하고 진부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넘쳐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당당하게 반박할 사람은 많지 않겠죠.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가지는 위상은 높아지지 않을까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요? ‘문송합니다’라는 밈은 끊임없이 유행할까요? 제 생각에 우리 사회가 여전히 인문학에 냉소적인 것은 ‘인문학의 쓸모’에 대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설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인문학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의 부재를 포함해서요.
귀한 시간을 내서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계신 당신이라면 분명 인문학에 어느 정도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도 ‘아 인문학 그 돈도 안 되는 거!’, ‘그 뜬구름 잡는 소리 공부해서 뭐해. 그 시간에 영어 공부나 재테크 공부를 더 하는 편이 실용적이잖아.’라는 말을 주변으로부터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어쩌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들의 이러한 냉소적인 반응에 뭐라고 대답하시나요. 자신만의 훌륭한 논리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대부분은 ‘인문학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하며 속앓이하고 계실 겁니다.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저 역시도 그런 날들이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런 여러분들이 ‘인문학도 쓸모가 있다.’ 아니 이를 넘어 ‘인문학은 현대를 살아가는 나의 삶에 꼭 필요하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도우려 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잔뜩 잡아 놓았지만, 정작 인문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새롭지 않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떤 생명체인가’,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은 그 형태가 조금씩은 다르더라도 인간이 수천 년 전부터 품어온 것입니다. 이를 주제로 한 연구도 수없이 많아요. 수많은 철학서와 문학 작품이 이러한 주제를 품고 있습니다. 역사는 또 어떻죠? ‘사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애초에 ‘과거’의 일을 규명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문사철로 주제를 한정하여 이야기했지만 모든 인문학적 탐구의 근원에는 그러한 고루한 물음들이 깔려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똑같은 질문들을 물고 늘어졌는데, 명쾌하게 떨어지는 답변이라도 하나 제대로 구했을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수학이 공리와 논리로 답을 찾아내는 것처럼, 과학이 수없이 많은 실험으로 귀납적인 증명을 해내는 것처럼, 인문학도 무언가 명쾌한 답변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는데, 주장과 근거들만 난무하지 그것이 진리라고 ‘증명’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혹시 인문학적 질문에 대해서 ‘내 말이 진리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따라야 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하세요.) 그렇다면 인문학은 그저 낡디낡은 학문인 뿐일까요? 의미 없는 탁상공론일 뿐일까요?
플라톤의 대화편인 『고르기아스』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칼리클레스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답도 없는 철학을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그보다는 세상에 쓸모 있는 기술을 배우라고, 진리가 아닌 명성을 좇으라고 말이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 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며,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말을 빌리면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집어치워. 정신 차리고 경영대학원이나 가.”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봅시다. 인문학이 던지는 질문들은 도대체 어떻게 수천 년간 살아남았을까요? 명쾌한 답도 없는 질문을 우리는 왜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물고 늘어질까요? 이에 샌델 교수는 답합니다. 그러한 질문들이 위대한 지성인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고 사라지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인문학의 문제들이 비록 완벽한 해결은 불가능하더라도 ‘인간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임을 방증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 문제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일상’에 닿아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가 마주하는 선택과 행동의 바탕이 되면서요.
인문학의 역할은 그러한 일상에 ‘균열’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관념과 체계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인문학을 배우다 보면, 언제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관념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내가 만들어온 세계, 타인이 만들어온 세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그간 답을 내려본 적 없는 문제에 대해 답을 내려보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행동 하나하나에 복잡한 생각의 과정이 개입하곤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문학이란 매우 귀찮고도 두려운 작업입니다. 그런 질문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러한 질문을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거든요. ‘그래서 그 귀찮고 두려운 작업이 왜 필요한데?’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요. 이제부터 이에 대한 답을 드려볼게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새로운 시선’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지금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거듭할수록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죠.*
2010년 구글 최고경영자(CEO) 에릭 슈미트는 한 컨퍼런스에서 “우리는 하루 동안 2.5 엑사 바이트(EB=10억 GB)만큼의 정보를 만들어내는데, 인류 문명이 출현한 시점부터 2003년까지 만들어낸 정보는 5 엑사 바이트 수준”이라며 “오늘날에는 단 이틀이면 인류 문명 이후 축적된 만큼의 정보를 생산한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IBM의 연구에 따르면 인류가 수만 년의 역사 동안 생산해 온 데이터의 총량의 90%가 지난 10년 동안에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
기술, 환경,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우리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부작용들도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환경문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분쟁, 기아와 빈곤, 팬데믹 등 인류에 대한 물리적인 위협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의 발전에 의한 인간성의 변화, 기술 발전에 대한 윤리적 고려, 정치 경제적 시스템의 변화 등 관념적인 차원에서의 위협도 존재합니다. 말 그대로 지금 우리는 ‘문명의 대전환기’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문명의 대전환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해 한국의 인문학계를 이끄는 석학 최진석 교수님께서 말합니다.
기존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지키려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문명의 흐름에 새로 등장하는 조짐이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2018)-
그의 말처럼, 새로운 시선과 창의성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시발점이 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발전을 거듭해 왔죠.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대표작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에 있어 창조적 소수자(Creative Minority)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 주장은 합리적입니다. 창조적 소수자란 문명을 쇠퇴하게 하는 도전의 기미를 누구보다 먼저 간파하고 이에 응전할 수 있도록 앞장서, 사회 구성원들을 일깨우는 사람들입니다. 분명 앞서 이야기했듯 문명의 대전환기인 지금 이 시대에서 그런 창조적 소수자의 등장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리고 최진석 교수님의 표현 역시도 이 사회를 이끌어갈 소위 ‘리더’가 되길 희망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였습니다.
최진석 교수님께서는 같은 책에서, 관성대로 사는 삶을 ‘지적 게으름’이라고 표현하며 비판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적으로 게으른’ 이들이 마냥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역사의 발전이 독창성을 가진 리더들만의 덕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위해 분투해온 모든 이들이 직접적 간접적으로 역사의 발전 속에 함께 했습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위인들이 대단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개인들이 덜 대단하다거나 그들이 살아온 삶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켜온 일상이 없었다면, 그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분투해온 삶의 여정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당신과 나도 이곳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지적으로 게으른 이들도, 부지런한 이들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편안함을 추구하고 관성에 따라 사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그러한 본성을 따르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요.) 모두가 창조적 소수자로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나 하나의 삶을 짊어지기에도 이 세상은 너무나 각박한걸요. 그러니까 저런 쓴소리에 평범한 시민인 우리가 뜨끔할 필요는 없습니다.
용어 해설: '자연주의의 오류'란 윤리적 판단과 사실 판단을 동일시하여 자연의 법칙 그 자체를 윤리적으로도 옳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이제 그러한 지적인 게으름이 주는 폐해가 사회적 차원을 넘어 개인의 삶에 있어 생존에 관련된 실제적인 위협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리더가 아니더라도 말이지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실 당신께서는 아마 이미 경제활동을 하고 계시거나 준비 중이실 텐데요. 그런 당신이 머지않아 피부로 직접 느끼실만한 변화는 바로 직업관의 변화입니다. 여기저기에서 괴담처럼 떠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제 머지않아 대부분의 사유와 행동을 AI와 로봇이 대체할 것이 자명합니다. 블루칼라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직업 세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성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에도 그러한 조류가 뚜렷하지만, 평생 하나의 능력으로 하나의 직업을 통해 살아가는 이들의 비율은 계속해서 줄어갈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용어 해설: '러다이트 Luddite 운동'이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기계에 일자리를 뺏길 것을 우려한 영국 공장지대 노동자들이 일으킨 ‘기계 파괴 운동’을 말합니다.
이제 ‘문명의 흐름에 새로 등장하는 조짐이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사회에서, 또 일상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의 경제/사회 구조에 매우 거대한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는 곧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이제 당신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는 인문학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나를 지킬 처세술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 인문학의 본질적인 역할이 일상에 균열을 내고 관습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 또한 커지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DNA에는 ‘인문과 기술의 결합’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기술의 개발에 있어 언제나,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이 실제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고려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기업이 인문학을 자신들의 사업에 실제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죠. 구글 역시도 2016년에 진행한 신입사원 공채에서 합격자의 80%를 인문학 전공자로 채웠습니다. 실제로 많은 연구는 미국 주요 기업들의 채용 담당관들이 의사소통 능력, 비판적 사고, 창의력 등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독창적인 시선을 갖춘 인재가 빛을 발하는 시대가 바로 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독창성은 어디서,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독창성의 발휘를 위해서는 ‘자기 이해’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나를 알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알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자기 이해의 과정입니다. 나를 모른 채로, 그저 세상의 오만가지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것은 자신을 그저 성능 좋은 메모리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보다 성능이 좋은 메모리는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 당장 여러분이 들고 계신 스마트폰에도 여러분의 머리보다 많은 정보가 들어있는걸요! 중요한 것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산출해 내는 여러분만의 ’고유한 관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독창성이죠. 그리고 나만의 관점을 만드는 데에는 ‘자기 이해’, 즉 나에 자신에 대한 앎이 필요합니다.
인문학은 여러분의 ‘자기 이해’를 도움으로써 여러분의 독창성을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합니다.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말입니다. 현상을 넘어서는 고차원적 사유는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기능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은 사유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인류가 수천 년간 축적해온 ‘사유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러한 수천 년의 지혜를 자신의 지혜로 소화하는 바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이란 사유하는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온 ‘사유의 지도’입니다. 평생을 인간으로서, 인간과 함께,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당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수천 년간의 시행착오와 교훈을 담은 지침서입니다,
그러나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타인의 사유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언제나 정답만을 제시하기에 이를 그대로 암기하면 되는 다른 학문과는 달리 인문학은 사유의 결과물보다는 ‘사유 자체의 과정’을 중시합니다. 사유는 이론적 학습이 아닌 ‘훈련의 대상’입니다. 사유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지혜’입니다. 번뜩이는 스킬이 아닌 ‘습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체화된 나만의 사유가 자신과 세상을 보는 여러분만의 고유한 관점을 만들어줍니다. 기존의 관습과 체계, 일상에 균열을 내며,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물으며,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고민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되물으며,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유를 통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이해’는 행복한 삶을 위한 밑바탕이 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움을 중지할 자유가 없다.
nous ne sommes pas libres de cesser d’être libre.
사르트르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식을 깊게 살펴보니 우리는 정말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여러분은 거의 끝까지 다 읽은 이 글을 그만 읽고 변덕스럽게 다른 글을 읽을 수도 있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주방에 갈 수도 있으며, 의식을 저 멀리 날려 뜬금없이 우주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라는 말이 풍기는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사르트르는 자유란 곧 ‘불안’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이는 곧 내 모든 결정과 행동에는 스스로의 책임이 따른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좀 많이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법을 지키지 않으려면 지키지 않을 수도 있고, 생을 마감하자면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껄끄러움을 느끼겠지만 한번 깊게 생각해보면 여러분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스스로라는 것만 알아두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유, 그리고 책임으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 필연적인 운명으로부터 불안이 움틉니다.
그렇게 인간은 매 순간 불안 속에서 부담을 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부담은 때로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이게 내가 바라 왔던 삶이 맞나?’라는 염세적인 물음으로 나에게 돌아오곤 합니다. 그리고 이는 그 어떤 큰 세속적 성취를 이룬 이들이나 겉보기에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이들 역시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던질 물음입니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좌우하는 차이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이때 그러한 부담으로부터 나를 단단히 지탱해 줄 수 있는 것, 그 질문에 당당하게 답하고 앞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아낼 수 있게 하는 것은 스스로가 만든 나의 자화상입니다. 즉 ‘자기 이해’입니다.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채로 세상에 던져진 나를 채울 나만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이해는 나만의 사유의 관점을 만드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인문학은 사유의 훈련이자 ‘자기 이해’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인문학은 당신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그리고 더욱 단단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길고 길었던 글의 논지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인문학은 사유를 통한 자기 이해 훈련입니다. 인문학은 일상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나만의 독창적 관점을 갖게 하고, 이로써 실존적 불안 속에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성과 독창성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제 그러한 능력은 생존의 필수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당신의 삶에 분명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가요? 저와 함께 당신의 일상 속에 인문학적 사유를 더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물론, 제 필력과 학식이 부족하여 설득이 충분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 글의 부족한 설득력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삶들이 함께 만들어갈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인간으로서 사유하며 살아갈 매일매일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유합시다!
오늘의 질문
인문학은 쓸모 없어! 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