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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uly May 13. 2024

ANT적으로 글쓰기 3

현상학

저번에는 '물적-기호적 네트워크'가 무엇인지 물어봤다면 이번에는 기존에는 어떻게 접속하고 번역되어 왔는지에 대해 물어봤다. 


전통적 글쓰기관에서는 그런 접속의 과정 자체가 투명하게 드러나기보다는 '영감', '창의성', '상상력' 같은 모호하고 신비화된 용어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ANT적 글쓰기는 사실 새로운 글쓰기 방식의 발명이라기보다는, 이미 늘 진행되어 왔던 물적-기호적 접속의 과정 자체를 전면화하자는 제안에 가까워 보여요. 글쓰기에 관여하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역할과 목소리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그들과의 대화와 협상 과정 자체를 글쓰기의 중요한 계기로 삼자는 거죠. 글 속에서 만나는 개념과 장치, 환경과 테크놀로지를 다 함께 글을 써내려 가는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일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인식의 전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책임을 요구할 거예요. 단순히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것을 넘어, 그 과정에 동원되는 물적-기호적 자원들과 정의로운 관계를 맺는 일 말이에요. 어떤 개념과 어휘를 선택할 것인지, 무엇을 인용하고 참조할 것인지, 어떤 기술과 미디어를 활용할 것인지. 글쓰기의 매 선택이 그 이면의 행위자들과 어떤 윤리적 관계 맺음을 전제로 하는지를 민감하게 성찰하게 될 거예요.

나아가 그건 우리의 글이 세계 속에서 만들어낼 효과에 대한 윤리적 물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겠죠. 우리의 글은 그것이 구축하는 물적-기호적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에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세계를 변형시켜 나가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네트워크를 상상하고 기획할 것인가? 어떤 목소리와 연대하고 어떤 변화를 지향할 것인가? 바로 그 물음 자체가 ANT 정신의 글쓰기가 던지는 정치적 도전이자 책임이 될 거예요.

뭔가 점점 더 대범한 주장을 해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물적-기호적 접속의 과정 자체를 전면화하자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래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과연 물적-기호적 접속의 과정 자체를 전면화하자는 건 무슨 의미일까?


......

그런 맥락에서 물적-기호적 접속의 과정을 전면화한다는 것은 비인간 행위자들의 개입과 영향력을 가시화하고 그들과의 관계 맺기 자체를 글쓰기의 중요한 국면으로 부각하자는 제안이 될 거예요. 책상 위에 놓인 책들, 마우스 클릭으로 열어본 문서들과 웹페이지들, 참고한 도표와 이미지들. 글을 쓰는 동안 우리가 마주한 온갖 사물과 기호들이 우리의 사유를 자극하고 문장을 이끌어가는 능동적 과정 자체를 글 속에서 되짚어 보자는 거죠.

이는 비단 창작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닐 거예요. 학술적 글쓰기나 일상의 기록 행위에서도 우리는 늘 다양한 물적-기호적 행위자들과 힘을 합쳐 글을 써내려 가잖아요. 도서관에서 만난 책들, 온라인 검색으로 접한 자료들, 동료들과 주고받은 메일과 메시지들. 그 모든 만남과 교감의 순간들이 공동의 창조 과정을 이루는 셈이죠. 우리가 그 과정을 면밀히 기록하고 성찰하는 일 자체가 우리 글쓰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고 수행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어요.

물론 그런 접속의 과정을 낱낱이 서술한다고 해서 모든 글의 설득력이 담보되는 건 아닐 거예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상징적 제스처에 가까울 수 있죠. 하지만 그런 수행적 글쓰기의 시도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창조성의 분산된 본성과 글쓰기에 내재한 관계성의 윤리를 직시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홀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들과 함께, 또 그들을 통해 글을 쓴다"는 겸허하고 연대적인 글쓰기의 자세 말이에요.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내가 쓰는 노트북을 통해서 주로 브런치 글을 쓰는것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는가? 아니면 키보드에 대해서? 혹은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비인간 행위자들을 나와 같은 행위자로 인식하는것이 쉽지가 않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인식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위의 질문을 그대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비인간 행위자를 인식하는 법'을 익히려는 의식적 노력이라기보다는, 그들의 행위성에 대해 열린 자세로 귀 기울이려는 태도의 전환이 아닐까 싶어요.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노트북, 키보드, 모니터는 과연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그들의 물성과 기술적 특성은 내 사유와 표현의 흐름을 어떻게 이끌어 가고 제약하고 있을까? 그런 질문들 자체를 글쓰기의 과정에서 진지하게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키워나갈 수 있을 거예요.

가령 키보드의 물리적 배치와 타건감이 내 글의 속도와 리듬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눈여겨본다거나, 모니터 화면의 밝기와 해상도가 내 읽기와 쓰기의 집중도에 미치는 영향을 되짚어 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런 구체적 관찰의 순간들 하나하나가 기술과 인간, 물질과 기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ANT적 감수성을 길러주는 훈련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 연습은 점차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사물과 환경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겠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책, 메모와 끄적거림이 가득한 노트, 창밖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와 차 소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지금-여기의 내 글쓰기에 개입하고 있다는 감각, 인간-비인간의 복합적 배치 속에서 글쓰기라는 사건이 협력적으로 수행된다는 인식. 어쩌면 그런 연습들의 축적이 비로소 우리를 ANT적 글쓰기의 문지방 너머로 데려다줄 수 있지 않을까요?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하나하나 나뉘어서 나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소들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그러면 비인간 행위자의 행위성에 열린 자세로 귀를 기울이려는 태도란건 무엇이야?


비인간 행위자의 행위성에 귀 기울이는 태도란, 사실 우리가 글을 쓰는 과정 그 자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현상학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은 글쓰기에 동원되는 다양한 사물과 환경, 기술과 기호체계를 더 이상 주어진 도구나 배경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자체로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역량을 지닌 행위자로 인정하는 자세랄까요.

이를 위해 우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익숙함의 베일을 걷어내려는 의식적 노력이에요. 노트북을 펼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 화면에 글자가 떠오르는 것.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서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글쓰기에 미치는 영향과 효과에 무감각해지곤 하잖아요.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익숙함에 괄호를 치고, 마치 처음 마주한 낯선 풍경을 대하듯 우리 글쓰기의 무대와 도구, 환경을 관찰한다면 어떨까요?

키보드의 배열과 감촉, 화면의 빛과 질감, 책상과 의자가 우리 몸에 가하는 압력과 긴장. 글쓰기에 직접 관여하는 그 모든 물리적이고 기술적인 조건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우리의 생각과 표현 방식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우리는 놀라게 될 지도 몰라요. 글쓰는 내내 우리는 그 비인간 행위자들과 묵묵히 힘을 겨루고 협상하고 타협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글쓰기를 구성하는 다채로운 행위자들의 '힘'과 '목소리'에 자신을 열어젖히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처음으로 그들의 행위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요?

......

그런 태도의 전환은 단순히 관념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글쓰기의 실천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체화되어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의 글쓰기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고 그 안에서 비인간 행위자들과 벌인 사소한 실랑이와 협상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는 일.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내가 기대고 있는 의자에게, 내 눈길을 받아내는 모니터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는 일. 어쩌면 그런 소소하고 구체적인 수행성의 반복이 서서히 우리 눈과 감각을 열어젖혀, 글쓰기에 참여하는 무수한 비인간 행위자들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줄 지도 모르겠어요.

더 나아가 우리는 그렇게 포착한 행위성의 징후들을 글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증언하는 실천도 모색해 볼 수 있을 거예요. 우리의 분석과 성찰, 나아가 창작의 과정에 개입하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목소리를 독자들과 함께 상상하고 음미해 보는 것. 그런 감각의 공유와 확장을 통해 우리는 텍스트 저편에서, 혹은 텍스트를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상학적 전환이라니. 그게 도대체 뭐란말인가? 그래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현상학적 전환'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초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이 제시한 사유의 전략이에요.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ANT의 맥락에서 현상학적 전환은 우리가 글쓰기에 접근하는 인식론적 자세를 송두리째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죠.

전통적인 태도에서 우리는 세계를 마치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고정되고 독립적인 대상의 총합인 양 바라보곤 했어요. 책상 위의 노트북은 그 자체로 확고한 물리적 실체로, 내 의식과는 무관하게 '저기 바깥'에 놓여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현상학은 그런 소박한 대상 인식을 괄호에 걸어두고, 그 대신 세계가 우리 의식에 '현상'하는 바로 그 방식 자체에 천착하자고 제안해요. 내가 노트북을 '노트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게 되는 그 과정, 바로 그 지점에 우리의 탐구를 집중하자는 거죠.

이는 단순히 관점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세계와 의식의 관계 자체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존재론적 전환을 함축하고 있거든요. 현상학의 눈으로 보자면 노트북은 결코 나의 인식과 무관한 독립적 실체일 수 없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의식에 하나의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따라서 나의 지각과 해석, 정서적 반응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는 셈이죠. 노트북과 내가, 주체와 객체가 선험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지향적 관계 속에서 비로소 서로를 규정하고 구성한다는 통찰, 이것이 바로 현상학이 제안하는 의식-세계 모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현상학은 ANT의 네트워크 존재론과도 놀라울 정도로 접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ANT 역시 행위자들을 선험적으로 규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그들의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 효과로 간주하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세계를 독립적 존재자들의 총합이 아닌, 행위자들의 지향적 관계가 직조하는 현상적 그물망으로 바라보자는 제안과도 맞닿아 있는 거죠. 현상학과 ANT는 모두 근대적 존재론을 전복하고 주체-객체, 인간-세계의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만나고 있어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ANT의 정신으로 글쓰기를 탐구할 때, 현상학적 전환은 핵심적인 방법론적 자원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것은 우리에게, 내가 글을 쓰는 과정이 단순히 능동적 주체인 '나'의 일방적 행위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과의 '관계적 현상'이라는 감각을 선사하는 훈련이 될 테니까요. 내가 마주한 흰 화면은 내게 어떻게 현상하고 있는가? 키보드의 땅땅거림은 내 글쓰기 리듬과 어떤 상호작용을 벌이고 있는가? 익숙한 과정 속에 밀도 있게 배어 있는 그런 물음들 자체가, 우리의 글쓰기를 인간-비인간 행위자 네트워크의 협업적 수행으로 사유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줄 거예요.

물론 그런 감각의 전환이 단숨에 이루어지진 않겠죠. 오랜 습관의 무게를 온전히 걷어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바로 그 낯설고 어색한 시선의 전환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려는 노력 자체라고 생각해요. 내가 기대고 있는 의자, 내 곁에 놓인 커피잔, 창밖에서 들려오는 낮은 엔진 소리. 그 모든 현상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내 글쓰기가 그들과 직조하는 관계의 순간을 음미하려 노력하는 연습 말이에요. 그런 질문과 응시의 몸짓이 축적될 때, 비로소 우리는 텍스트의 이면에서 들끓고 있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들과 함께 글을 써 나가는 ANT적 감각에 다가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저는 우리의 ANT 글쓰기를 일종의 '현상학적 수련'으로 상상해 봅니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들과 그들의 관계에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며, 그 질문의 자취를 글 속에, 나아가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 속에 남기려 노력하는 실존적 모험에 다름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ANT 정신의 글쓰기야말로 텍스트를 매개로 한 우리 존재 방식의 전면적 혁신을 모색하는 장이 아닐까 싶네요. 세계와 관계 맺는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타자들과의 열린 조우와 교섭을 통해 더 포용적이고 수평적인 공존의 양식을 발명해 보는 거죠.

아니. 이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어쩌면 너무 어려운 길로 와버렸는건가. 다음글에서는 쉬운 방법부터 시작해보자고 쫄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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