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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자 Jun 29. 2021

지도를 만들며 여행 중 02

02. 기간 한정 배드민턴 : 언젠가는못할지도모르는 것들

유방암 진단 후 첫 진료까지 내가 한 것들.


제일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병원 선정이었다.


 지방에 살다 보니, 주변 사람(지역 사람)들이 전부  서울 가서 치료하라고 조언을 하셨다. 나는 비교적 가까운  지역 대학병원도 고려하였으나, 하나 같이 "서울 가야지!"하시는 . 결국 서울의 4 병원(서울 삼성, 신촌 세브란스, 서울아산, 국립암센터: 서울이 아니지만.)  가장 빨리 진료가 잡히는 병원으로 선택하였고,  이후에 다른 병원 예약을 잡았으나 결국에는 취소를 했다. 취소한 이유는, 일단 처음 잡은 병원에서 검사하는 일정만 2주간(, , , )이었고,  나중에 들어보니 지방에서 왔다고 하면 2 정도로 검사일정을 조절해준다고 했는데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병원에 가기가 어려운 , 조직슬라이드를 제출해야 하는데 제출할 조직 슬라이드가 부족했다. 조직슬라이드는 제출하면 다음 진료에 받을  있다고 했는데, 다음 진료는 20 후였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대학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아야   같았는데,   바늘을 넣고 싶지 않을뿐더러 지금 검사로도 4일을 빠지는데,  이상 검사 일정을 받는다면 일을   없을  같았다.


 그렇지만, 만약 첫 진료에서 너무나 불쾌한 경험을 하거나 병원에 대한 느낌이 별로였다면 바꾸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첫 진료를 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있는데, 옆방에서 진료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료실 양쪽을 사용하며 한쪽은 대기, 한쪽은 진료로 끊임없이 진료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들도 대단하시다.) 재발 의심이 들어 검사를 하신 건지, 아니면 정기 검진인지 모르겠지만 검사 결과를 듣는데 선생님께서 "이상 없습니다"라고 하셨고 듣는 분은 우셨다. 선생님이 상냥하게 "이제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이 주는 느낌이 따뜻했다.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아 진심은 알 수 없으나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환자에게 노력할 줄 아는 의사라면 믿어볼 만하지 않을까? 불안한 환자에게는 그런 마음씀 하나가 크게 닿는 법이라 그 점이 마음에 들어 굳이 다른 곳에 가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다음에는 병원 검사와 진료에 맞추어 수업을 조정하고, 혹시 도움을 줄 이들을 찾았다. 4일이나 되는 검사를 남편에게 다 따라오라고 할 수 없어서 마지막 금요일(진료를 통해 결과를 듣는 날이기도 했다!)만 동행하고, 화요일은 동생에게 부탁하고, 목요일과 다음 주 월요일은 서울에 사는 육아휴직 중인 친구에게 부탁했다. 목요일만 부탁했는데 월요일도 와준다고 해서 고마웠다. 검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처음에는 딱 검사 시간에 맞추어 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일찍 가서 앉아 있다 보면 검사가 일찍 끝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요일에 MRI가 6시였는데, 찍는 시간이 30분은 걸려서 그렇게 진행된다면 7시 버스 막차는 타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최대한 일찍 가자는 마음으로 가서 대기하고 하다 보니 6시에 검사가 완료되어 막차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다.


 CT조영제 부작용도 없었고, MRI도 금방 끝났다. 검사는 걱정한 것보다는 훨씬 쉽게 끝났다. 맘마 프린트도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남은 것은 결과뿐.


두 번째 할 일은 체력, 식단 관리였다.


1. 할 수 있는 검사는 하자.

 나의 선택권이 전혀- 없는 병원 검사와는 달리, 이것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는 숙제였다. 내가 건강하지 않다는 불안은 모든 것을 흔들었다. 머리가 아프면 뇌전이, 배가 아프면 간 전이, 이런 생각에 시달렸고 다른 곳에도 암이 있지 않을까 불안했다. 배가 아프면 위암, 등이 아프면  췌장암. 과체중인 나는 당뇨도 걱정이었고 이미 고혈압약을 먹고 있는 상태였다. 모든 것이 불안했다. 갑상선암, 자궁경부암, 난소암, 암은 너무나 많았고, 대부분은 초기에는(심지어는 중기에도!) 증상이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 같이 느껴졌다. 이런 것들은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으니 불안을 양분으로 걱정은 더욱 커져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년에 국가검진을 안 해서 이번 6월까지 검진을 마쳐야 해서 국가검진을 했다. 자궁경부암 검사는 그때 하게 될 것이고, 살면서 처음으로 위내시경을 추가했다. 내시경은 비수면으로 신청했다. 잠들어 버리는 것이 무서워서이기도 했고, 결과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용종이라든지, 뭐가 있다면 바로 알고 싶었다. 비몽사몽 한 간에 결과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내시경 검사를 하기 전까지 얼마나 떨리던지. 사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불안에 떨고 싶지도 않았다. 뭐든 늦게 아는 것보다는 지금 아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기다리는 의자에 붙은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위 상태는 아주 좋아요. 깨끗-합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야호. 하나의 걱정을 덜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풍경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국가검진을 통해 혈당 수치도 정상, 자궁경부암도 이상 무.( 결과 나오기까지 2주 동안은 조르였지만, 그래도 안심. ) 물론 그래 봤자 암환자지만.


2. 식단을 관리하자.


 유제품, 커피를 끊었다. 커피는 마셔도 된다고 하지만, 몸에 안 좋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식욕도 없었다. 방울토마토를 먹고, 파프리카를 먹고, 닭가슴살, 낫토를 먹었다. 간식을 끊었다. 너무 안 먹으니 배가 아프기도 했다.(그래서 위암을 의심했다.) 나는 '다노'라는 앱을 활용했다. 식단 관리, 운동 관리를 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유료이다. 결혼 이후로는 임신과 유산을 핑계로 무절제한 생활을 정당화했는데, 이제는 프로그램 관리 선생님에게 내 사정을 알리고 적극적인 코칭을 요구했다. 선생님은 너무 안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강경했다. 일주일에 700그램에서 1킬로씩 몸무게가 줄었다. (엄청난 과체중이었기에 가능한 일임. 비만지수 30 초과 임.)


3. 운동을 하자.


하루에 적어도 7000보, 많으면 만보를 걸었다. 아파트 뒤에 산책로는 짧은 오르막길 몇 번만 힘들고 나머지는 평탄한 길이다. 처음에는 그것도 헉헉- 거렸다. 그 길을 울면서 걸었다. 슬플 때 보는 자연은 더욱 아름답다. 생명력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은 너무 맑아서, 끝이 없어서 경이롭다. 풀들의 연두 빛이 너무나 선명해서 아름답다. 이른 아침 풀꽃에 맺힌 이슬이 너무나 눈부셔서 놀랐다. 새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았다. 새는 저렇게 온몸으로 울고 있었다. 나무의 오랜 세월을 부러워하며, 죽을지도 모르면서 나에게 달려드는 벌레에게 안타까움을, 때를 잘못 만나 말라버린 지렁이에게 슬픔을 느꼈다. 울음이 멈추지 않을 때는 전화를 하면서 걸었다. 그래도 걷는 동안에는 검색을 하지 않아서 걱정에서 벗어났다.


저녁에는 근력운동을 했다. 스쿼트였다. 10개만 해도 힘들었는데 조금씩 개수를 늘렸다. 그리고 다노에서 처방해주는 운동도 같이 했다. 처음에는 10분도 하기 힘들었다. 시간을 조금씩 늘렸다.


잠을 잘 잘 수 없으니 괜한 선잠으로 이상한 꿈을 꾸느니 일찍 일어나자 싶어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스트레칭도 하고, 찬송도 듣고, 명상도 하며 보냈다. 내가 그렇게 일찍 일어난다는 것을 안 남편이 직장에서 배드민턴을 쳐봤더니 재미있었다고 아침에 배드민턴을 치자고 했다. 배드민턴이라-. 배드민턴과의 인연은 나의 첫 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학교에는 배드민턴에 열정적인 체육선생님들 많았다. 교사 동아리를 만들어서 틈만 나면 가입을 권유했다. 젊고, 새로 부임한 선생님들은 그 제안에 끌려가기 마련이었지만 운동에 영 소질이 없던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운동해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권유하시던 그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결과는 안 나왔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소용없지만. 살고 싶다는 욕망은 굉장해서 나는 당장에 배드민턴 라켓과 공을 주문했다. 쿠팡으로 주문을 해도 일반 택배와 동일한 소도시. 라켓을 사러가는 길은 더욱 멀다. 근처에 배드민턴 장도 없다. 집에서 5분 정도 산책로를 걸으면 나오는 한산한 아침 농구장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으로 라켓을 잡았던 날. 서브는 정말 어렵고, 팅-, 팅-, 공이 튕겨나갈 때마다 팔꿈치와 팔목 사이가 아팠다. 살면서 처음으로 그곳에 충격을 받았다. 아리한 통증은 하루를 넘겼다. 남편이 공을 보내도 내가 칠 수가 없으니, 자꾸 흐름이 끊기고 서브를 넣어야 하니 나는 지치고. 30분을 계획했지만 25분을 간신히 넘기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가 무거웠다. 결국, 그날 새벽에 다리에 쥐까지 났다. 나 배드민턴 잘할 수 있을까?


연습을 한 것도 아닌데, 둘째 날에는 첫째 날보다는 주고받는 공 개수가 늘어났다. 연속으로 칠 수는 없었으나 (병원 진료 있는 날은 못 함) 그다음 날에 칠 때는 조금 더 공이 잘 보였다. 다음에는 칠 수 있는 각도가 늘었고, 서브를 할 때 요령도 생겼다. 아대를 샀더니 팔의 통증도 줄어들었다. 몸은 가벼워졌고, 팔에는 힘이 붙었다. 운동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혹은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할 수 있게 된다'라고들 하는데,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은 어랏? 하는 느낌이 들면서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할 수 있다는 느낌, 나는 회복할 수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찾는 것은 소중했다.


 남편은 이제껏 한 운동 중에서 배드민턴이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나도 이제야 배드민턴이 뭐가 재미있는지 느꼈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는 배드민턴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배드민턴 라켓으로 하는 캐치볼을 하는 것에 가깝다. 네트가 없으니 승점을 정하기도 어렵다. 우리가 뿌듯한 순간은 서로 주고받는 순간이 잘 연결될 때, 상대방이 칠 수 없을 것 같은 공을 주었을 때에도 그것을 쳐내었을 때 그런 순간에 즐거워한다. 그래도 내가 서브를 잘 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걸 상대방이 못 치면 짜릿하다. 점수를 매기지는 않지만, 대체로 오늘은 내가 좀 잘 쳤는데- 하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런 날은 돌아오는 길이 더 신난다.


이제 고작 3주를 치고 이런 느낌을 받는다고 놀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건 배드민턴이 아니지,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애초에 잘 모르는 분야니까. 어쨌든, 우리는 지금 배드민턴에 빠졌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내가 유방암 수술을 하고, 치료를 해도 이 운동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유방암은 왼쪽 편에 있다. 나는 오른 손잡이이므로 라켓을 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온몸을 흔들면서 하는 이 운동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병이란 것은 그렇다.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꼭 한계를 만든다. 물론,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이루어진다- 같은 주문을 걸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에 성공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치유 과정을 앞두고 나는 얼마나 더 배드민턴을 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 시간까지는 지금을 즐긴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크기에 지금이 더욱 소중하다. 그것은 즐긴다,라고 표현은 하지만 어쩌면 절박한 몸부림이다. 우울은 날카롭거나 무겁지 않다. 차갑거나 시리지도 않다. 그것은 젤리처럼 말랑하고 뜨뜻미지근해서, 한 번에 힘을 주어 떨어뜨리기가 어렵다. 내 안에 있어도 별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고 금방 익숙해져서 서서히 나를 잠기게 만든다. 끝없는 나락이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세상 끝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면 생각한다. 어쩌면 먼 미래에, 나는 지금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때 그 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말이다. 지금의 내가 암을 알기 전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주 7일 배드민턴 계획을 세우고, 만약 오늘은 피곤해서 못 칠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날 성당 헌금을 만원 더 내기로 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비가 오더라도 아침, 저녁에는 안 왔으면 좋겠다. 아침은 배드민턴 때문에, 저녁은 야구 때문에.)



어쨌든 체중은 줄고(그래도 초 과제 중), 체력은 늘었다. 그래서 활동량이 더 늘어나 웬만해서는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는 부작용이 생겼다. 그러나 누워서 뒤척이는 시간은 훨씬 줄었다.


세 번째 할 일은 수면, 정신 건강 관리였다.


1. 일을 하자.


암을 알게 되면 대체로 잠을 잘 못 잔다. 항암 중에는 부작용으로 잠을 못 잔다. 호르몬 약을 먹게 되면 치료 중에도 잠을 못 잔다. 치료 전, 치료 중 불면은 환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건강의 기본일 텐데, 그것이 안되면 스트레스가 커진다. 만병의 근원이 바로 스트레스가 아닌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일을 지속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만 있었다면 하루 종일 유방암 생각에 매몰되어 아무것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직장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만의 세계를 부수고 침범한다. 그것이 좋았다.


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 수업 교환도 해야 하고, 아이들은 찾아와 조잘조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누가 때렸어요, 누가 제 물건 가져갔어요, 누가 뛰어요- 등등. 중1은 마치 초등학생 같아서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 중1 담임을 한 건 8년 전이었다. 그 전에는 고3 담임을 하고 내려와서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 당황했다. 마치 친구처럼 할 이야기, 못 할 이야기를 나누던 다 큰 학생들을 보다가 겨우 나의 가슴께에 오는 아이들을 마주하는 당혹감이란. 물론, 피곤할 때에는 그런 것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다른 것으로 인한 짜증은 유방암으로 인한 공포보다는 나았다. 수업을 하다가도, 해맑게 웃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에도 갑자기 눈물이 나기는 했지만 선생님께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학생들 덕에 들키지 않고 넘어갔다.


또, 교무실 메이트 선생님들이 좋았다. 다들 도와주시려고 했다. 기운을 북돋아 주고, 교환이 되지 않는 수업을 부탁할 때에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실 어려웠으리라. 할 일이 있으면 몸을 움직였다. 몸을 움직여야지 밤에 잠이 잘 온다고 생각했기에 더 악착같이 움직였다. 이 외에도, 자기 전에는 물 안마시기, 휴대폰 사용하지 않기 등을 병행하고, 혹시나 잠이 안 오는 날이면 스탠드를 켜고 어려운 책을 읽었다. (유방암 관련 책이 아닌 관계가 없는 책) 운동량도 늘어가고, 몸도 피곤해지니 잠이 드는 시간이 단축되고, 깨는 시간도 줄었다. 평균 11시쯤 잠들어 6시에 일어났다.


2. 신앙에 의지하자.


나는 모태 신앙 기독교인이다. 그렇지만 인생 중 절반 이상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결혼 전 다니던 교회가 있었으나 결혼 후 지방으로 옮겨 오면서 출석이 어려웠다. 다행히 ZOOM으로 예배를 진행하여 참석할 수 있었다. 암을 알고 나서 바로 교회 분들에게 알렸다. 기도를 해달라고. 이토록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은 적이 있었던가. 임용고시를 공부할 때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기도. 남편은 천주교 신자로, 시댁은 할머니 때부터 3대가 독실하게 천주교를 믿었다. 우리는 각자의 종교를 존중하기로 했지만, 내가 천주교로 개종을 하기로 했다. 성당과 달리 교회는 각자 교회만의 분위기나 특색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약자와 소수자와의 연대, 개방적인 분위기의 내가 다니던 교회와 같은 교회를 이 지역에서 찾기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천주교 예비자 교리반에도 같이 다니고 있으며 미사도 참석한다. (교회 분들도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라며 허락해 주셨다.)


목요일은 평일 미사가 끝나면, 예비자 교리반이 있다. 지하에 있는 교리실로 가는 계단 위 천장에는 '항상 기뻐하십시오'라는 테살로니카 전서의 말씀이 쓰여 있다. 그 말과 이어진 구절을 조금 더 하면 아래와 같다.                                                                                                                                                    

테살로니카 전서 5장 16-22절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걱정하는 것보다는 기도하는 것이 낫다. 기도란 의지를 더하는 것이다. 걱정과 불안은 의지를 약하게 만들지만, 기도는 의지를 강하게 만든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마음을 잠재울 수 있다. 테살로니카 전서처럼 항상 기뻐할 수는 없지만, 사소한 것에도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될 수는 있었다. 지금 살아 있는 것, 오늘을 살아내는 것, 이 속에서 웃을 수 있는 것, 아름다운 것을 찾을 때, 평소보다 더 진동을 느끼며 반응하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두 가지를 기도하였다.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실 것과 그 어떤 결과에도 내가 무너지지 않고 받아들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개는 사실 다른 방향의 기도이다. 우리 가정을 지켜달라는 말은 이 유방암이 초기로 쉽게(?) 고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고, 그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전이나 그 이상을 고려하여하는 기도였다. 어떤 것을 빌어야 하는지 나는 내내 고민했다. 기도는 이쪽 편으로 기울었다가, 저쪽 편으로 기울기도 했다. 그 고민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기 전에, 목사님께 고민 상담을 하자 목사님이 말했다. 기도의 첫 번째는 '침묵'이라고, 하나님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 아실 거라고. 그렇게 말하자 쥐어짜 내 듯하는 기도를 멈추고 잠시 침묵하였다. 내 안에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시는, 혹은 나의 손을 잡아 주시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런 시간이 끝나면 '자비를 베풀어 달라'라고 기도하고, 기도문을 외웠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모송 등을 외웠다. MRI를 찍을 때에도 기도문을 외우니 시간이 그리 지겹지 않았다.   


예비 교리자 반 교재에 이런 글이 있었다.


십자가를 자른 사람들


사람들이 아침부터 제각기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먼 길을 가고 있었다.  다들 자기가 짊어진 십자가가 무거워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꾀를 내어 점심때쯤 톱으로 자기 십자가를  잘라내었다.
"아이고, 이제 좀 가벼워졌네. 진작 잘라낼 걸 그랬어!"
그 사람은 십자가가 한결 가벼워졌다고 좋아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남들을 앞질러갔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도 톱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히 인내하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
 어느덧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모두 종착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엔 뛰어넘을 수 없는 큰 도랑 하나가 흐르고 있었다. 도랑 건너편엔 예수님이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사람들은 기쁜 얼굴로 예수님을 향해 각자 지고 온 십자가를 도랑 위에 걸치고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십자가를 자른 이들은 그 길이가 짧아 도랑을 건널 수 없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운이 좋아 피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아니다. 나의 십자가, 그리고 나 때문에 생긴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를 인정하기로 했다. 유방암에 걸려서 가장 미안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1년 남짓의 연애, 그리고 4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 중 일주일에 한 번은 병원에 가게 되었다. 임신과 유산, 그리고 유방암. 그리고 그 끝이 해피엔딩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그 상황이 서글펐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 내가 아무리 애석해해도, 남편의 십자가를 대신 지어 줄 수는 없다.


3. 사람들과 연대하자.


 나는 타고나기를 외향적인 사람인가 보다. 유방암 카페를 보면 암인 사실을 가족 이외에 알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들 중에서도 같이 사는 가족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결과를 알게 된 날 양가 가족들에게 알리고, 가장 친한 친구들과 선생님께도 알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출근해서 교무실 선생님들께 말했다. 그 주 주말에 교회에 말을 했고, 결국 검사 전까지 친하다고 생각하는 바운더리의 사람에게는 다 알렸다. 사람들은 나를 위로했으며, 정보를 주기도 했고, 찾아와 위로도 해주었다. 나는 그런 것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혼자 있는 시간과 사람들과 있는 시간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 있는 것이 힘들다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힘들다면 혼자 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어떤 쪽이든 그 시간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의미가 있다.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격려도 많았다. 가끔 사무치게 외로운 순간, 혼자 버스를 타고 서울 병원으로 가는 날이라든지, 퇴근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너무도 무거운 날.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안부를 묻는 전화, 제주도에서 날아온 싱싱한 하귤, 커피 쿠폰과 차.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지인들은 검사를 하는 날이면 태워주겠다고 했고, 그 전날 자고 가라고 하기도 했다. 그것이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그 마음은 전해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유방암 카페 일명 '유이'에서도 연대의 힘을 느꼈다. 나는 주로 처음 진단받은 사람들이 쓰는 가입인사를 주로 읽었다. 처음 유방암을 알게 되어 떨고 있는 사람들과 소소하게 주고받은 '동병상련'의 마음은 위로가 되었다. 가입인사를 하자, 같은 지역에서 진단받은 분이 답글을 다셨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친절하게 댓글을 다셔서 감사인사를 나눴다.


첫 진료에서 최종 진단까지 20일, 처음 암을 알게 된 순간부터 한 달여간 내가 한 노력들은 이랬다. 이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무서웠고, 두려웠으며, 절망했고, 슬퍼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노력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버틸 수 있는 힘. 발악-에 가까운 이 모든 노력으로 시간이 흘렀다. 암이라고 해서 모든 순간이 고통과 절망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일상의 힘은 대단해서 삶이라는 것을 꾸려지게 만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다, 그것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손 놓고 허망하게 있고 싶지는 않다. 이 시간을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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