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골에 눈 오던 날
간밤에 꽤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쌓인 갯골은 어떤 모습일까? 질퍽질퍽한 눈길에 입이 댓 발 나올 법한데 갯골의 새로운 풍경을 볼 생각을 하니 입술을 도로 말아 물게 된다. 갯골 공원 내에 군데군데 물을 가둬둔 곳이 있는데 모두 꽝꽝 얼었다. 투명한 얼음판 위로 소복이 눈이 쌓였다. 추운 방안에서 폭신한 이불을 어깨 위로 덮어 양팔로 끌어 안 듯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풍경이다.
안 그래도 고요한 갯골에 잔잔히 흐르던 물결마저 사라지니 마치 스노우볼 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낡은 선반 위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오랜 스노우볼. 누군가 손에 쥐고 흔들지 않는다면 그대로 쭉 멈춰있을 스노우볼 속에 나도 가만히 서 있다. 둥그런 구슬에 갇혀서 답답한 마음이 들 법도 하지만, 오히려 풍경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안정감을 느낀다. 지금, 딱 그렇다.
싸늘하고 시린 계절이지만 하얀 눈을 보면 포근해진다. 희한하게 눈을 한자 ‘설(雪)’로 표현하면 차가운 느낌인데, 우리말 ‘눈’으로 쓰면 따뜻한 느낌이다. 발음 때문일까? 아니면 눈에 어린 정서 때문일까? 눈꽃, 눈송이, 함박눈 등 눈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보면 몽글몽글 마음이 느슨해진다. 추운 겨울이지만 그것마저도 아름답게 즐기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걸 두고 겉바속촉이라 하니, 눈은 겉차속따이겠다.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하니까.
“아이고 여기 하루종일 있으려면 춥겠다.”
“히터라도 가져다 틀고 있지!”
“종일 하는 건 아니죠? 추워서 어떡해.”
어쩌다 한 번 찾아오는 눈송이 말고 매일 수시로 나타나는 겉차속따가 여기 있다. 소금창고를 찾아주시는 분들의 다정한 인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소금창고가 목제 건물이라 화재 위험으로 난방이 어렵다. 문화재 등록을 준비하고 있어 인공적인 온도 변화로 건물이 손상될 수 있어 지양하고 있다. 그래서 바깥 기온이 떨어지면 실내도 서늘해진다. 원활한 통풍으로 위해 트여놓은 틈 사이로 갯골의 세찬 바람이 불어와 차가운 공기가 잘 들어오기도 한다. 오랜 시간 근무하는 게 아니기에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애초에 따뜻한 차림으로 출근하고 있다. 핫팩도 두둑이 챙겨주셔서 덜 힘들게 일하고 있다.
하지만 보시기엔 안쓰러워 보이는지 오시는 분마다 안부를 물으신다. 온기 가득한 한마디가 마음의 온도를 올린다. 손끝 발끝은 시려도 뜨거워진 마음에 기대 감사하며 근무하고 있다.
어느새 올해 남은 달을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게 되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본다. 어느 때보다도 옴짝달싹 못 했던 시간이었지만 그 와중에 열심히 꼼지락거렸던 순간이 스쳐 간다. 어둠과 밝음의 너울이 다이내믹했던 한 해였다. 어둠에 너무 가라앉지 않고 밝음에 너무 들뜨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까이서, 또 멀리서 감싸주는 온기들이 있어 가능했다. 이 마음 소중히 간직하며 다가올 너울도 유연하게 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