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뮈바튼-레이캬빅-블루라군
옥신각신한 전날 밤과 달리 캠핑장의 아침 풍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너무나 평화롭다. 아침 일찍부터 호수에 면해있는 텐트들 사이로 오리들이 일어나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음식을 얻어먹는 모습이 탁발승의 아침 식사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바튼 호수를 둘러보았는데 맑은 물과 화산지대가 어우러진 모습이 우리 제주도와도 비슷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들이 많은 것도 비슷했다.
1번 국도를 좀 더 달려서 고다포스에 도착했다. 고다포스는 어제 본 데티포스처럼 엄청난 규모로 위압하는 느낌은 없었지만 물 색깔이 푸른 빛이어서 맑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슬란드의 산문 문학인 사가(Saga)에 따르면 천년 전 아이슬란드 왕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그 전에 믿고 있던 신상을 이곳에 던져버렸다는 곳으로 그만큼 아이슬란드 역사에서 상징적인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다포스라는 말 자체가 ‘신의 폭포’라는 뜻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서쪽을 향해서 가다가 멀리에 특이한 모양이 산이 있어서 가 보았다. 마치 탄광촌에 석탄을 쌓아놓은 것처럼 검은 색의 산이었는데 성산 일출봉처럼 위쪽이 잘린 사다리꼴 모양이었다. 흐베르프잘(Hverfjall) 분화구라는 곳인데 성산 일출봉처럼 화산재가 분출한 곳이라고 한다.
한번 올라가보기로 했는데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꽤 높은 산이어서 헉헉대면서 올라갔다. 중간에 포기하고 그냥 내려올까도 생각했는데 어떤 일본인 부부가 겨우 걸을 것 같은 애기 두 명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을 보고 왠지 포기하면 안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끝까지 올라갔다.
정상에서는 주변의 경관을 파노라마처럼 둘러 볼 수 있었는데 스피릿이나 오퍼튜니티가 보내주는 화성의 경치와 비슷한 느낌이다.
서쪽으로 계속 가다 보니 아쿠레이리라는 조그만 바닷가 마을이 나왔다. 시내에 박물관이 하나 있었는데 잘사는 나라여서 그런지 작은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세련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박물관이 바다에 바로 면해 있었는데 10미터쯤 되는 데크 위에서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들까 말까 하고 있어서 잠시 구경을 했다. 여름이라지만 꽤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 아이들은 덜덜 떨면서도 한 두 명씩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그 중 한 아이는 고소공포증이 있는지 뛰지 못하고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고 있으니 더 부담을 느끼는지 계속 망설인다. 나머지 아이들이 놀리기도 하고 용기를 북돋기도 하다가 하도 망설이니까 급기야는 한 아이가 뒤에서 밀어버린다. 바닷가에 빠진 아이는 뭐라고 욕을 하면서도 그제야 용기를 얻었는지 다시 올라와서 다 같이 뛰겠다고 포즈를 취해준다. 착한 아이들이다. 나중에 스킨헤드만 되지 말거라.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근처에서 잠잘 곳을 찾기로 했다. 주위에 집들도 없고 바람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바닷가 언덕 위 초원에 괜찮은 장소를 발견하고 텐트를 쳤다.
서둘러 식사 준비를 하고 밥을 먹으려는 데 양 울음 소리가 나서 소리 나는 쪽을 봤더니 저 멀리에 양인지 염소인지 한 마리가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일단 상황을 보려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양인지 염소인지가 그물에 뿔이 걸려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뿔에 그물이 패인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시간 동안 거기에 걸려 있었던 거 같아서 풀어주려고 다가갔는데 이놈이 미친 듯이 왔다 갔다 하면서 발버둥쳐서 잘못하면 뿔에 받혀서 내가 다칠 거 같았다. 뒤에서 정차장과 권셰프가 보고 있어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어서 좀 겁이 나긴 했지만 조심스럽게 뿔을 잡고 그물을 살살 풀어주니 냅다 도망간다.
일행인듯한 놈들이 주변에 기다리고 있다가 한참을 도망가다가 안전하다 싶은 거리가 되니까 서서 빤히 쳐다본다. 은혜 갚은 까치처럼 염소도 은혜를 갚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차가웠기 때문에 침낭을 잘 덮고 자야 했다.
자다가 보니 점점 날씨가 추워져서 해도 뜨기 전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밖에 나와보니 텐트와 차 위는 물론 풀밭에 온통 하얀 서리가 내려 있었고 입에서는 연신 하얀 김이 나온다. 잘못하면 얼어 죽겠다 싶어서 차에 올라타서 히터를 틀고 보니 바깥 온도가 영하 3도란다. 한여름 가장 더운 계절인데 영하 3도라니… 이 부근에 캠핑장이 없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권셰프는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차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지난 밤의 꿈 얘기를 해 주었다.
“어릴 때 키우던 백구가 밥상 머리에서 얼쩡대길래 숟가락으로 몇 대 때려줬거든? 그랬더니 백구가 울적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피카츄가 나타나서 백구와 함께 너는 죽을 것이다… 라며 저주를 내리더라구. 내가 왜 죽냐고 물었더니 이미 상복도 맞춰놨다며 계속 저주를 내리길래 옥신각신하다가 깨보니 얼어 죽을 지경이었던 거지.”
두서 없는 얘기였지만 권셰프가 자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권셰프의 오리털 침낭은 어찌된 영문인지 솜털보다는 깃털이 훨씬 많이 들어있어서 간밤에 추위를 훨씬 더 느꼈을 거 같다. 온 들판에 낀 하얀 성에는 해가 지고 나서야 조금씩 사라졌다.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뜬금없이 왠 쇠공이 있다. 지름이 5-60센티 정도 되어 보이고 뭔가를 꽂을 수 있는 구멍 같은 것이 있었는데, 뭐에 쓰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해외토픽 같은 데서 하늘에서 쇠공이 떨어진 것을 본 적이 있는 데 이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좀 떨어진 부근에서는 네모난 모양에 구멍이 뚫려있는 돌판도 있었는데 이것들이 뭔가 신비한 고대 유적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아틸란티스의 유적은 아닐까?
오늘은 드디어 아이슬란드를 한 바퀴 돌아서 레이캬빅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레이캬빅까지는 남은 거리가 많지 않아서 일단 예약한 숙소에 도착한 후 블루라군에 가 보기로 했다.
블루라군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천 온천인데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행을 마치고 들러서 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 간다는 곳이다. 애초에는 가격이 너무 비싸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이 한번씩 꼭 들른다는 점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아서 블루라군 대신에 레이캬빅에서 좀 떨어진 스네펠스요쿨 반도 국립공원에 가기로 했었지만, 거친 아이슬란드의 들판에서 몇 일 노숙을 하고 났더니 뜨거운 노천탕에서 몸을 푹 담그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게다가 지옥에서 온 미찌들에게 물린 자리가 아직도 계속 가렵고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블루라군의 온천수 효험에 한번 기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레이캬빅을 향해 한참을 운전하던 중 길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얼른 차를 세우고 낚시하는 사람들한테 갔더니 이 사람들이 우리를 경계하는 눈치인 것이 아마도 우리가 낚시 허가 단속 나온 사람들인 줄 알았나 보다.
우리는 그 동안 여러 군데서 낚시를 허탕친 후에 다른 사람이 하고 있을 때만 우리도 해보자고 약속을 했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낚시를 해 보자고 얘기했는데, 두 사람은 빨리 레이캬빅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한다. 빨리 블루라군으로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모양인데 어차피 온천에서는 기껏해야 서너 시간 밖에 못 있을 테니 낚시를 하고 가도 충분하다고 내가 얘기했지만 두 사람은 막무가내로 가자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낚시를 포기하고 레이캬비크로 돌아왔는데, 생각해보면 낚시를 한다고 고기를 잡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도착했네요”
미리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주인 아주머니가 마치 ‘너네 들이 진짜로 올 줄은 몰랐다.’는 투로 맞이한다. 몇 달 전에 예약을 했었는데 아마도 그렇게 오래 전에 예약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런 거 같다.
게스트하우스가 모던한 느낌으로 특이하게 지어진 곳이었는데 주인 아저씨가 직접 짓고 아주머니가 인테리어를 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 말고도 9군데인가 집을 지어서 세를 줬는데 금융위기 때문에 4채를 은행에서 가져가버렸다고 주인아저씨가 투덜댔다.
드디어 오매불망하던 블루라군에 도착했다. 면적이 5,000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야외 온천인 블루라군은 지열발전을 하고 남은 물을 이용하며, 다양한 미네랄이 풍부해서 피부병에 효험이 좋다고 한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한겨울 영하 10도쯤 되어서 주변이 온통 얼어붙을 때가 블루라군을 가장 잘 즐길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오묘한 옥빛의 물이었는데 민물인줄 알았더니 소금물이어서 얼굴이 따끔따끔했다.
미찌에 물린 얼굴은 낫는 건지 더 악화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화끈화끈한 것이 시원한 기분이 들기는 한다. 어찌되었든 그 동안 쌓인 몸의 피로가 풀리는 거 같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블루라군에는 노천 온천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사우나나 편의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하루 종일 빈둥대면서 피로를 풀기에 좋은 곳이다. 블루라군 입장료는 여러 옵션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데 우리는 무조건 제일 싼 티켓으로 샀다.
옵션 중에 실리카 머드 마사지가 포함된 가격이 있어서 그걸로 할까 살짝 고민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실리카 머드는 노천 온천 여기 저기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널려 있었다. 실리카 머드 때문인지 블루라군은 특유의 아름다운 연한 옥빛 물 색깔을 자랑하는데 문제는 불투명한 물색 때문에 물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권셰프와 정차장이 나에게 오더니 바로 앞에 있는 한 커플을 가리키며
“형, 쟤네들 좀 이상하지 않아?”
라고 말해서 봤더니 진짜로 좀 수상한 느낌이었다. 젊은 남자가 벽을 등지고 여자친구를 안고 키스를 나누며 애정행각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쪽 사람들이 대체로 애정표현을 자유롭게 하니까 첨엔 그런가 보다 했지만 둘의 움직임을 보아 단순한 키스 정도의 행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투명한 물 색으로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짐작이 맞다면 정말 정신 나간 커플일 것이다.
낚시도 포기하고 왔으니 저녁 7시까지는 못나간다고 엄포를 놨지만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담그고 있다 보니 시간이 지나니 점점 답답해져서 못 버티고 5시쯤 나와서 차를 반납하러 갔다. 차에 작은 자갈에 긁힌 자국들이 많이 생긴 것 같았지만 어차피 자갈 보험에 들어 있어서 렌터카 회사 검수 직원이 차를 한번 둘러보더니 반납 서류에 ‘매우 더러움’이라고 적는 것으로 반납이 완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서 마당에 있는 데크에서 밥을 해서 반찬을 늘어놓고 먹었는데 손님들이 신기한 듯이 쳐다보면서 지나간다. 블루라군에서는 선글라스를 쓰고 물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했는데 나중에 짐을 정리하다 보니 선글라스가 얼룩이 져서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블루라군 물 속의 화학 성분으로 해서 코팅이 벗겨진 것 같았다. 입장료 몇 푼 아낀다고 난리 칠 게 그런 정보나 제대로 알고 갔어야 했는데, 결혼할 때 큰 맘 먹고 산 아까운 선글라스만 버리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