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시대와 쇼펜하우어
(1) 락 붐이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우리같은 하꼬 밴드의 음악도 자발적으로 듣는 리스너가 점점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둔감한 내가 느끼기에도 확실하다. (그나저나 특히 90년대 록이 유행한다. 이것도 읽다보면 이해가 되는 현상일 것이다.) (+언제쯤이면 밴드부 공연에서 돈 룩 백인 앵거를 그만 들을 수 있을까?)
(2) 더불어 에반게리온도 붐이다. E.o.E의 극장 개봉, 마하그리드의 팝업, 쏟아지는 밈&매거진 계정들의 찬사와 그 반응 들을 보면 이것도 명징한 사실이다.
(3) 이 두 현상이 별개의 현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혹자는 ‘걍 2단계 힙스터 되고 싶어서 좋아하는 척 하는 거 아님?’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4) 요즘 가장 핫한 철학자가 누구일까? 단연 쇼펜하우어다. 나는 락과 에반게리온의 열풍과 쇼펜하우어에 대한 열광이 이어진다고 본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고통은 필연적이고, 인생과 타인의 무상함을 강조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했다. 의지(욕망)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누구나 괴롭다는 것이다. 좀 어렵게 쓰긴 했는데,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다.
(5) 저성장 시대다. 나 포함 내 주위 모두가 힘들게 살고 있는게 전보다 더 피부로 느껴진다. 물가는 오르고, 돈 많은 집주인은 월세도 올리고, 월급은 그대로고. 나도 좀 보수적인 성향에 ‘노오력’을 평소에 외치지만, 요즘은 나도 ’노오력‘에 대해 회의적이다. 도대체가 매일 죽을 듯이 사는데, 달라지는 것도 없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매일의 연속이다. 문제는 이것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근데, 예전에는 뭔가 풍요로웠던 느낌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 느낌이 내가 좇는 목표이자 이상인데, 현실은 왠지 괴로운 것 같다. 이 이상 때문에 더 괴로운 것 같다.
(6)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이러한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고 했다. 멜론 댓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비정한 세상, 피토하는 음악’을 예전부터 주장한 셈이다. 또한 그는 음악이 음악을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의지를 표현하는 형태로 봤다. 락 음악은 강렬하고 역동적인 성격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락이 유행하는 이유는 내면의 감정과 욕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대변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며, 지금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발로로도 볼 수 있다.
(7) 나만의 에반게리온 한줄 요약은 ‘아빠랑 싸우다가 나를 돌아보게 됐어요. 나를 돌아보니 세상을 오렌지 주스로 만들어 보고 싶달까? 엣큥’이다.
(8) 에반게리온은 인간의 고독, 고통, 그리고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깊이 있게 다룬다. 쇼펜하우어 또한 삶의 고통과 자기 존재를 강조했으며, 인간의 의지(욕망)가 불행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에반게리온 내에서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고뇌와 세계의 종말적 시나리오는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유사하다. 결국 지금이 고통의 시대기 때문에, 우리는 신지(어쩌면 에바에 나오는 아무나)에 우리를 투영하며 에바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9) ‘공명‘이라는 음악 용어가 있다. 같은 진동수가 서로 만났을 때 그 진폭이 뚜렷하게 증가하는 현상이다. 이 어두운 시대에서, 인간의 어두움을 다룬 쇼펜하우어 철학과 락, 그리고 에반게리온이 공명을 내고 있다. (진짜로 요즘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살고 있는 것 같긴함)
(10) 그래도, 만약 철학도 옷이나 음악처럼 순환론적인 흐름을 띈다면, 쇼펜하우어 다음에 우리에게 찾아올 철학은 니체다. 내 해석으로 니체 철학을 천박하게 요약하보자면 ‘운명? 알빠노. 고백하면 그만임’ 이다. 지금 시대가 저성장이든 어떻든 뭐 그건 알바 아니고. 지금 시대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점을 찾고 나아갈 수 있는 내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