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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생 Jan 14. 2021

인생은 그런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의 합작

김박은경,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문학동네

가진 적 없는 것을 잃을 수도 있나요 기억나지 않는 기억도 있나요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있나요 예, 혹은 아니요 하지만 겨울을 알면 겨울을 보게 됩니다 거울을 알면 거울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바라본다 해도 변해갑니다 바라보는데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은 곁에 있어요 영원히 영원은 아니니까요 좋아요

오늘의 영원 中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알고 있거나 더 모르고 있을 수 있다. 이 큰 세상에서 아주 작은 나는, 좁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버릇처럼 좁은 생각들로 세상의 전부를 가늠하려고 든다. 좋음과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 존재와 무존재 등, 그런 것과 그러지 않은 것 사이에 선을 그으려 한다. 아주 작은 내가 이 큰 세상을 둘로 나누는 엄청한 일을 하려고 한다.


 선을 긋는 사람은 비단 나만이 아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각자 저마다의 선을 그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수많은 선들이 겹치다 보면, 선이 아니라 면이 된다. 아주 멀리서 이 세계를 내려다보면, 그런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는 어떠한 선도 존재하지 않고, 한 데 섞여 면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고 그러하지 않다는 말은 모순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일들이 실재한다. 누군가의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런 모순들 앞에서 사람들은 선택을 하려고 한다. 그러한 것, 혹은 그러하지 않은 것 중 하나를 고르려고 한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한 편은 버려야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이다. 영원히 좁은 세계에 갇혀 살거나, 세상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거나.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어느 것도 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방법은 눈 앞에 있는 선을 지우는 것이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겨 버리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 때, 가진 적도 없었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 때, 기억나지 않는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때, 눈을 감고 숨을 한 번 쉬고,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자. 이 말만은 모순이 아니다. 정말로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니까, 우리가 보고 듣고 믿는 것 이외에도 미지의 것들이 가득하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이 무한한 세계에서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사라지지 않았는데, 왜 사라졌을까?

가진 적이 없었는데, 왜 잃어버렸을까?

기억나지 않는데, 왜 기억할까?


 이런 질문들을 곱씹으며 밤을 새웠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떠나갔고, 떠나는 이들을 잡지 못했고, 잡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왜, 왜, 왜, 나는 왜 그랬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에 답을 구해야만 했던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선을 그었다. 발끝에 선을 긋고, 나는 넘어가지 않겠다고 너도 넘어오지 말라고 혼자 유난을 떨었다. 전보다는 조금 희미해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선은 내 발밑에 남아있다. 다 지워버리고 싶은데, 발로 쓱쓱 문지르면 사라질 선이라는 것을 아는데, 쉬우니까 오히려 더 어렵다. 이것도 모순이라면 모순이겠지, 세상사가 다 그런 것처럼.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일은 그만두었다. 나는 본래 답을 찾는 일에 약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정확한 답을 구해야 하는 수학을 못했고, 싫어서 포기했다. 정답이 있는 수학 문제 하나 풀지 못한 내가 세상의 답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애초에 세상에 답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리리가 없잖아. 지금은 세상에 답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이 어려웠던 것은 내 머리가 나쁜 탓이었겠지만, 인생이 어려운 것은 내 머리 탓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수학은 포기했어도 인생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인정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존재인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만의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선을 지울 용기가 없지만, 이 선은 언제나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모든 것은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한다는 것을, 세상에는 그러한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이 공존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겨울의 찬기도 존재하는 동시에 사라지는 중이다. 그래도 슬프지 않다. 어쨌든 겨울은 나와 함께하고, 지금 좋으면 된 것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영원히 영원은 아니라서, 나는 오늘도 삶을 반복한다.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길고 긴 여행 하나가 끝나간다 가끔은 빛과 열기가 가끔은 칠흑과 한기가 돌림노래처럼 되풀이되었지만 그래서 좋고 나쁘지만 다시는 못 가겠어, 돌아서서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다시 티켓을 끊고 마는 여행 중독자처럼 응급실 문이 또 열린다

밤 열두 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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