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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무당 Jan 29. 2023

[독서일기] 존재의 지도

: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 레비 R. 브라이언트

| 세계관의 답보를 어떻게 좀 해봐요들, 우리


   『존재의 지도: 기계와 매체(media)의 존재론』의 목표는 레비 브라이언트가 서문에서 밝히듯 전통적인 유물론의 변화와 갱신에 있다. 이것이 절실한 이유는 유물론을 위협하는 실질적인 사람들이라는 게 스스로를 유물론자라 강조하는 대륙 전통의 이론가와 사회/정치 이론가들이기 때문이다. 레비 브라이언트가 보기에 유물론을 참칭 하는 그들의 입장은 전혀 유물론적이지 않은 내용과 방식으로 유물론을 망치고 있다. 특히 지젝으로 대표되는 (레비 브라이언트의 표현에 따르면)비-유물론적이고 반-유물론적인 입장이 '유물론'이 주목해야 하는 시급한 문제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칸트, 헤겔,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주체-객체'라는 세계관에 대한 비판에 있다. 즉, 인간으로 상정되는 '주체'가 '객체'로 상정되는 세계를 마음껏 주물러댈 수 있는 많은 권리와 권력과 권능을 부여했다는 것이 문제적이라는 것. 레비 브라이언트는 이와 같은 입장을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라 지적하면서 '객체'라는 것이 '주체'라는 인간의 공학적 태도로 지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님을 강조한다. 쉽게 말해 "인간들아, 시건방 좀 그만 떨어"라는 이야기다.


   전통적인 유물론자들의 이와 같은 시건방은 유물론이 "문화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으로 환원"된 것과 관련한다. 레비 브라이언트는 이처럼 유물론의 변질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1) 유물론자는 모든 것이 물리적이라고 믿는, 즉 헤겔이나 플라톤의 경우처럼 관념이나 개념이 존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엄격한 유물론자'거나 2)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이론적 구상에 힘입어 유물론자는 담론성, 개념,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 테스트 그리고 의미(관념적인 것들)를 존재를 형성하는 질료로 여기고 3)역사적 유물론에 이르러서는 과학과 의학의 모든 발견을 담론적 사회적 구성물로 매도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신유물론 입문: 새로운 물질성과 횡단성』의 저자 문규민 역시 역사적 유물론의 문제적 입장에 대해 전혀 유물론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노동'을 중심으로 인간-주체와 자연-객체가 맺는 물질적 관계란 주체가 자연을 '갖다 쓰는' 물질이거나, 인간에 의해 '쓰임을 받는' 물질성이 전부라는 것이다. 또한 레비 브라이언트의 말을 빌려 지젝의 문제적 발언을 비판한다.


"유물론은 내가 보는 실재가 결코 '전체'가 아님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실재의 대부분이 내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가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어떤 얼룩, 맹점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실재'는 라캉적 '실재Real'로, 그 의미를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선 라캉-헤겔로 이어지는 지젝의 기획에 접속할 필요가 있다. 문규민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유물론이, 그러니까 유물론이 다루는 '물질'이라는 것이 왜 물질 그대로 이해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라캉적 의미의 실재가, 그 관념이, 철학적 담론과 그 문화가 현행적 차원의 물질 그 자체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유물론자들은 유물론이 필수적으로 다뤄야 할 유물; 그러니까 물질을 등한시한 채 그것과 관계되는 인간이라는 주체의 맥락을 강조하면서 담론적, 문화적 차원만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비인간 혹은 탈인간적 경향', '인간중심적, 인간주의적 사유로부터의 단절', 나아가 '물질에 대한 새로운 존재론'을 기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레비 브라이언트가 『존재의 지도』에서 겨냥하는 기획이자 동시에, 오늘날 다채로운 유물론의 입장들을 포함하는 '신유물론'이라는 것의 내용이다.



| 개념적으로 퉁쳐서 죄송합니다만, 새로운 유물론이 묘해


   물론 이와 같은 '신유물론'이라는 것은 통일된 학파나 사조라고 보기 어렵다, 고 문규민은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신유물론'이란 우산 용어로 그 아래엔 객체지향 존재론이나 사변적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생기론적 유물론과 같이 "매우 다양한 개념들과 맥락을 가진, 이전에는 전혀 유물론(적)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들, 예컨대 정동(affect)이나 배치(agencement), 나아가 수행성 같은 개념들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이질적 사유 방식"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 신유물론을 한데 묶어 비판하는 것은 헛발질에 가깝다, 고 역시나 문규민은 말한다.(1)


    근데 전통적인 유물론이라는 것이 정녕 '주체'와 '객체' 이분법에서 중단되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칸트, 헤겔(그리고 마르크스)이 말하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라는 것이 레비 브라이언트가 일갈해버린 인간중심주의와 너무나 다르다고 보는 입장인 바. 당장 레비 브라이언트가 대놓고 지적하는 슬라보이 지젝의 '주체' 개념부터가 인간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먼데다, 그저 인간이 세계를 대상화하는 식으로 '객체' 개념을 남발하는 것에 있지 않은 게 그 예다. 특히나 주체와 객체의 상관관계라는 것이 변증법이라는 무적 필살기 같은 방법론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객체를 개별 '존재자'로 퉁쳐버린 채 변증법의 개입 여지를 소거한 세계관에서는 칸트, 헤겔(그리고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변증법 생태계가 접수될 리 만무할 밖에. 그러니 기존의 유물론을 비판하는 자들 역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몰이해를 고수한 채 스스로에게 향하는 비판에 대해 '우리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건 좀 너무 하는 거 아니냐는 그런 이야기다.


   특히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주체의 우선권에 의해서 객체와 접촉할 때만 객체가 존재로서 인정받는다는 식의 이해는, 주체와 객체가 오롯이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라 여기는 태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유물론을 논하면서 변증법에는 괄호를 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라고 나는 일단 그렇게 읽었다.


   이쯤에서 나는 새로운 유물론이라는 우산 용어에 관련된 사람들이 90년대의 디지털적 전회, 다시 말해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화와 함께 등장했다는 점이 참 신경이 쓰인다.


철학 생도들의 인터넷 블로그 사이트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서로의 블로그를 방문하고 코멘트를 남기며 교류하던 이들은 자신들이 어딘가 공통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기존의 초월적 인간주의가 공언하던 지식의 확실성에 의문을 품은 채 자유로운 사고를 실행하고 있으며(그런 점에서 그들은 사변적(speculative)이다), 저 악명 높은 칸트 이후의 비판철학에 의해 선언된 좁디좁은 현상계를 넘어 물-자체(An Sich, Thing-in-itself)란 이름으로 접근 금지된 세계, 불가해한 그 세계의 존재자들을 발견하고자 분투하고 있음을(그런 점에서 그들은 실재론(realism)을 지지한다) 확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영국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마련된 학술대회에서 한 자리에 모인다. 새로운 유물론의 대표 종(種)이랄 수 있을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 탄생한 순간이다.(2)



| 이식porting과 온톨로지Ontology: 사실은 컴퓨터 세상


   레비 브라이언트는 이와 같은 본인의 유물론 갱신 기획을 컴퓨터 용어인 이식porting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는 애덤 밀러의 개념을 빌려온 것으로, 어떤 프로그램이 이질의 소프트웨어 환경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재가공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레비 브라이언트가 '기계'로 재개념화를 시도하는 물질적/비물질적/유형/무형 등의 다양하게 현존하는 존재자/객체/실체/신체/사물 등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이식porting 방법이라는 것.


   하지만 여기서 조금 묘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이식porting이라는 것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간의 호환을 위한 방법이라는 점에 있다. 즉 그에게 이미 세계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컴퓨터 논리와 큰 차이가 없다는 입장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게 이질감의 정체라는 거다.


   그런 점에서 나는 레비 브라이언트가 겨냥해야 할 컴퓨터 언어 개념이 온톨로지Ontology가 아닐까 싶었다.


   IT 용어 온톨로지란,

   컴퓨터가 사람처럼 어떤 객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객체와의 관계나 특정 객체만의 의미를 표현한 자료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온톨로지 작업은 특정 영역이나 세계를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모호한 부분 없이 구체적이고 명백하게 컴퓨터 용어를 통해 개념화하고, 그 개념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며, 그 결괏값으로서의 객체들이 '공유'의 속성을 띨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들 내용을 한 줄 요약하자면 '세계를 컴퓨터가 소화할 수 있게 정보값으로 욱여넣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알렉산더 갤러웨이의『인터페이스 효과』몇몇 구절을 살펴보자. 

   갤러웨이는 컴퓨터라는 뉴미디어와 관계 맺기 위해선 '주체'가 어느 정도의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세상에 '정보적으로' 존재하고 컴퓨터의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필수 적이며, 그러한 즐거움은 "세계를 지우"고 "다양한 조작, 모델링, 합성, 변형"을 거쳐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세계 속 평평한 존재들이란 역으로 어떤 절대적 지평 위에 동일한 조건으로 (재)구성된 존재들이라는 말과 궤를 같이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컴퓨터라는 것이 세계를 명사화(nominalize)하고 정의 내리는(definitional) 기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컴퓨터라는 뉴미디어의 특징을 고려해 본다면, 레비 브라이언트가 그리고 싶은 존재의 지도라는 것은 IT 용어적으로 건 철학 용어적으로 건 컴퓨터라는 범용 기계의 명사화, 개념화, 정의(定義)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시건방진 결론이다. 


   '기계'가 존재자의 기본 단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탁월한 이유는 ··· 기계라는 개념은 존재자의 본질이 작동하거나 조작하는 것임을 훌륭히 포착한다. 존재하는 것은 행하는 것, 조작하는 것, 작용하는 것이다.


   레비 브라이언트의 말에서 앞서 언급했던 컴퓨터의 특징이 겹쳐 보이잖아?



| 그래서 결국 나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새로운 유물론이라는 우산 용어에 관련된 학자들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 기존의 철학적 기획이 만들어온 세상이 긍정적 발전보다는 혼란상의 심화로만 일관되었다는 점에서 위기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근본적 차원에 가하는 문제의식을 통한 패러다임 시프트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문제의 시급성을 전하기에 충분하디 충분하다. 대표적으로 기후 위기 같은 문제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그러한 문제의식과 문제제기 내용이라는 것이 기존의 전통적 철함 담론의 소화불량을 해소하기보다는 더부룩한 팽만감만 일으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앞서의 새로운 시도들이라는 게 포스트-시네마 담론의 특징들과 연동되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 점에서, 뭔가 뒤이어 정리할 이야기들에 조바심이 나는데. 이걸 어쩜 좋아. 그런 점에서 당면한 불만들을 해소하려 애쓰는 새로운 유물론 어드메 학자들이 생산적이고 발전적이고 긍정적이고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게으른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글 마무리가 왜 이래 이거.



독서일기 끗.


   

   




1) 문규민, 『신유물론 입문: 새로운 물질성과 횡단성』, 23쪽 각주.

2) 서동진, 「존재론적 (비)유물론의 매혹 혹은 그것은 충분히 유물론을 쇄신하고 있을까」, http://homopop.org/log/?p=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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