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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땅, 발리

10. SANUR_day9

발리에서의 첫날, 이게 발리로구나 생각했던 건 연기와 향기 때문이었다. 독특한 향기와 자욱한 연기. 사방이 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기 가득한 길.


왜 이렇게 연기가 많은가 했더니 뭘 태우기도 잘 태우고 특히나 아침 일찍 복을 기원하는 향을 거리마다 피우기 때문에 그렇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지나갔는데 어느 순간 좀 애틋하게 느껴져서 나는 되도록 신께 바친다는 그것을 밟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걸었다. 발에 차여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걸 보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든, 자신의 사업과 건강과 가족을 위해 비는 것이겠지. 십 분만 걸어도 족히 수십 개의 축복의 현장을 만나는 걸 보면 이곳은 분명 축복의 땅이다.



@거리 곳곳에 blessing


*canang sari*
차(카)낭 사리는 매일 제물을 위한 발리의 힌두교 종교 우파카라(장비)이다. 이 제물은 더 큰 제물의 일환으로 다양한 사원, 신사, 집 안의 작은 기도 장소, 그리고 거리에서 찾을 수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에게도 종교가 있다. 그러나 나는 되도록 종교 얘기는 남과 하지 않는다. 서로 종교에 대한 이해가 있거나, 좀 더 포괄적인 개념에서 ‘신’ 또는 이름을 짓지 않은 ‘Higher power’에 대해서라면 모를까. 본질이 변질되고 희한한 사상을 주입한다면 그게 나와 같은 종교라 해도 사양이다.


14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본토는 90% 이상이 무슬림, 발리는 90% 이상이 힌두교인 나라에서 드물게 자신의 종교를 지키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도 그들은 여러 번 위협을 당하고 '돈 많은 외국인(무슨 소리세요. 그때 제 통장에는 4,700원 있었는데요?)'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타깃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가끔 각자의 신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종교를 지키며 사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나는 내 의지로 종교를 갖게 된 건지 의문이 생겼다. 엄마는 마음이 힘들 때 종교로부터 위로받았다. 그 때문에 나의 종교도 엄마의 종교와 같게 되었다. 분명 시작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종교를 유지하기로(?) 했다. 과연 신이 정말 존재하는 건지는 몰라도 종교가 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신은 언제나 사랑을 말씀하신다.


언제나 문제는 그걸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인간일 뿐.






오늘은 사누르에서의 온전한 첫날이다. 확실히 우붓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널어놓은 빨래도 바짝 말랐다. 우붓의 눅눅하고 축축한 습기는 바닷가 근처의 짠내로 대신한다.


유튜브에서 보고 찍어 놓은 카페에 갔다가 라면 먹으러 간다. 하하. 현지 음식은 조식으로 충분하다. (조식 나시고렝 정말 최고!)


저녁은 숙소 근처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먹을 거다. 정말 무계획 속에 계획적인 J의 여행.


자리에 앉았고, 와이파이가 있으면 글부터 쓴다. 오늘은 제법 쌓인 여행기(라고 쓰고 수다라고 부르는)를 처음부터 읽어 보았다. 글을 쓰길 잘했지. 그때의 감정과 풍경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 좋다.


이제 여행은 3일 남았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일상의 시작이겠지. 나는 다시 시작할 힘을 충분히 얻었을까. 여행은 힘을 얻으려고 하는 걸까.






발리에서 4분은 천년의 시간이다. 아무리 가도 가도 왜 안 나오는 거지? 헥헥 다 포기하고 무념무상으로 걷다 보면 비로소 도착. 이미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카페에서 두 시간 이상은 있기 어려워 시간을 계산하고 나왔는데 점심 먹기까지 한 시간도 빠듯하겠다.


어렵게 찾아온 카페는 맛보다 장소가 세련되고 에어컨도 시원해서 좋았다. 오래 앉아 있기엔 장소가 좁아 불편할 수 있겠지만 한 시간 정도라면 괜찮을 듯.


자리에 앉아서 밖을 보니 날씨가 어마어마하다. 우기라더니 좀 늦게 시작하려나. 이곳에 온 이후로 딱 한번, 그것도 스콜로 금방 그친 비를 본 게 전부이다.



@The Bare Bottle Sanur
@cocochino


귀여운 아기가 카페를 휘젓고 다닌다. 모두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기가 무얼 하든지 다 오케이다.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인생의 유일한 기간일 거다. 존재만으로 사랑스럽고 사랑받는 존재.


카페에서 나와 다시 걷는다. 사누르가 우붓과 다른 점을 알겠다. 그건 바로 사람. 해변 근처에는 고급 호텔의 투숙객들과 여행객들이 제법 몰려 있지만 한 블록만 안쪽으로 들어와도 한산하다. 우붓이었다면 사람과 오토바이, 택시들이 뒤엉켜 혼을 쏙 빼놓았을 시간인데도 조용하고 또 조용하다. 거리의 호객 행위도 적다. 확실히 좀 더 여유 있는 분위기이다. 한편, 우붓에서는 많이 못 본 것 같은 러시아인들이 정말 많다.


@세상 구수한 인테리어의 yimo
@안성탕면에 계란 탁!



드디어(!) 얼큰한 라면을 먹고 슬슬 걸어서 바닷가 근처를 가 보기로 했다. 사누르는 바이크 타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이건 순전히 겁많은 내기준) 우붓은 기껏해야 골목길 아니면 2차선이 고작이고 그마저도 너무 막혀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데, 한적한 사누르에서는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데다가 길도 제법 넓다. 왕복 4차선은 되는 듯. 여기서 사고 나면 정말 크게 다치겠다 싶다. 그래서 첫날 갔던 한식집 ‘강남Gangnam’ 외에는 대부분 걸어서 다니고 있다. 사실 걷기도 꽤 괜찮다. 해변가를 걸으면 바람도 제법 시원하고 길도 잘 정돈되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다가 해변가에 앉아 쉬기도 하니 말이다.


여기선 급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걷기 좋은 사누르 해변


한참을 걷다가 잠시 해변가 빈 곳에 앉아서 바다를 보았다. 투몬비치(괌)에서도 해변가 모래사장에 앉아서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여기가 발리라니. 내가 발리에 와 있다니. 여행의 두번째 방아쇠를 당긴 기분. 나는 늘 발리를 동경했다. 두 번 만에 싱겁게 끝나 버린 로망이지만 우붓 숲속에서 요가하는 상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다음 로망은 스위스와 프랑스를 거쳐 가는 샤모니 몽블랑 트래킹이다. 이 코스를 처음 유튜브에서 보고 나는 완전히 사랑에 빠져 버렸다. 꿈을 꾸고 간절히 바라면 이뤄지는 모양이니 다음 로망을 실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봐야겠다.



@외국에서 만나면 늘 비현실적인 바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일정이 너무 아쉬워서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는다. 현실로 돌아가기 싫단 말이다.(엉엉)


이제 다시 새로운 회사에 가야 할 거고 또 낯선 사람과 적응해야 하는 나. 도대체 언제까지 이 형벌을 지속해야 한단 말인가.(휴가가 끝나가는 자의 다소 극단적인 생각)


너무 슬프니까 저녁은 근사한 데서 먹어야지.






@Brasserie République
@Brasserie République 시금치 라비올리


미쳤냐고. 진심 너무 맛있다. 내일 다시 와서 스테이크를 먹을까 고민 중이다. 분위기도 미쳐 버린 데다가 베지테리안 음식인 시금치 라비올리는 정말 환상적이다. 느끼한 음식을 많이 못 먹는 나도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오래간만에 한식 아닌 음식으로 제대로 한 끼 한 느낌.


@cosmopolitan


식사만 하고 가기 아쉬워 목테일 한잔을 더 시켰다. 이 밤이 가지 않길.. 현실이 너무 가혹해 정말. 이 천국을 두고 가야 한다니요.


@내 현실처럼 너덜거리는 양말, 여행 내내 이것만 신었다



배부르게 먹고 숙소로 돌아와서 배 두드리며 유튜브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행 왜 끝났어요? 영원히 여행하며 살면 안 되나요? 여행이나 왔으니 내가 코스모폴리탄이니 시금치 라비올리니 먹으며 멋들어진 일상을 보내지 현실에선 대충 한 끼 때우는 one of them으로 돌아간다고요.. 엉엉


내일이 사누르에서는 마지막 날일 거고 마지막 날은 짱구로 넘어갈지 울루와뚜 갈지 고민을 좀 해 봐야겠다. 마지막 휘날레니까 신중을 기해야지. 슬프다 슬퍼. 슬프니까 일찍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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