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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의미

08. UBUD_day7

아침부터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11월은 우기라더니 비는커녕 햇볕이 너무 세서 다니기가 힘들었는데 비가 제법 시원하게 내렸다.


오늘은 우붓을 여행할 마지막 날이다. 체크아웃은 내일이지만 다음 여행지로 이동할 계획이라 온종일 체크아웃, 이동, 체크인하게 될 테니까.


어쩐지 아쉬운 건 왜지. 중간에 너무 일정을 길게 잡았나 생각했는데 여행이 2/3 지나간 지금은 아쉽다. 이제야 좀 우붓에 익숙해지는 것 같은데 떠나야 한다니.


이래서 다들 돌아오는구나.


비가 내린 뒤라 바람이 시원하다.


@매일 아침 이런 뷰에서 조식


오늘은 라이스 필드가 펼쳐진 카페에 늘어지게 있어 볼 계획이다. 어제 하루 종일 시내에 있었으니 오늘은 외곽으로 간다.


밤에 잠드는 게 아쉬워 늦게까지 버텨 봐야 9시만 넘으면 곯아떨어졌다. 덕분에 이른 이침부터 일정을 시작할 수 있지만.


@cafe pomegranate
@cafe latte


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아서 고젝 기사님께 팁이라도 드려야 하나 고민하게 만든 cafe pomegranate. 도착하자마자 여긴 진짜 좋겠구나 감이 왔다. 넓게 펼쳐진 논과 야자수가 어울려 아무것도 안 해도 시간이 잘도 갔다.


오늘이 온전히 우붓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인데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고 아쉽다. 이래서 한 달 살기를 하는 거구나. 이런 곳에서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실컷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붓에서만 10일이라니 오버하는 거 아닐까 싶던 과거의 나, 반성해.







아침 일찍 왔더니 사람도 적당하고 햇빛이 뜨겁지 않아 좋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있자니 우붓은 참 다채로운 풍경을 가졌구나 싶다.


어제 있었던 센터는 콧구멍이 새카맣게 변할 만큼 교통 체증이 엄청나고 사람도 많다. 어딜 가나 ‘택시?’를 외치는 호객 행위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지니 뇌에 힘 꽉 주고 다녀야 하는데 말이다. 불과 센터에서 10분 정도 들어와 보니 이런 여유와 고요함이라니. 여긴 도대체 어떤 곳일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잘 안 되는 사람이다. 손도 빠르고 성격도 급하다. 이런 내 성질은 일할 때 약점이 되었다. 빠르게 직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한편 그런 나를 노리는(?) 무능력자 상사들도 많았으니까.


그들은 살살 책임감에 불을 지피는 말로 나를 자극하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하게 했다. “그게 니 일이야.“라던 상사가 생각난다. 나는 도대체 네가 어떻게 상사가 됐는지 모르겠어. 사람들이 다들 무능력하다고 욕하고 무시하는데 수치심도 없는지 이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성까지 엉망이다. 이거 무슨무슨 법칙 그런 건가?


그렇게 개 같이 일하다 결국 개 같은 꼴을 보고 더러워서 간다고 회사를 떠난 게 1년 전이다. 시간 참 빠르다. 스스로는 도저히 내려놓질 못하니 신께서 나에게 극약 처방을 내리신 건지 작년의 그 지긋지긋한 사건 이후로 나는 조금은 에라 모르겠다 정신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참여한 프로젝트가 그랬다. 아무리 봐도 외부인이 이런 형태(프리랜서 계약)로 참여할 일이 아닌 데다가 나에게 내부 직원과 같은 책임감을 요구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는데 희한하게도 대기업은 이상스럽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갑이다. 나는 을이고.


일단 회사는 고용 계약이 아닌 사업 계약을 맺은 나의 근태를 관리했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음은 물론이고 모든 팀, 파트 회의에도 참석했다.


당연히 부당한 요구라는 걸 알았지만 급여만 밀리지 않는다면 이 정도 푸시는 감안할 생각이었다.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 프로필에 남기기에도 나쁘지 않았다.(후에 이 경력으로 업계 1위 회사와 면접을 보기도 했다)


인수인계는 1.5일. 그 이후부턴 폴더 경로하나 쥐어 주고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하는’ 어른이 된 것.


일단 정해진 일정 따라가기도 바빴고, 퀄리티에 대한 고민은 내가 아닌 그들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도무지 밸런스의 감(다른 내부 직원들 업무 결과물과의 통일성)을 잡기 어려워 대략적인 수준으로 일정 내에 결과물을 만들고 피드백을 받았다. 물론 피드백을 주는 자는 죽을 맛이었겠지만 그건 직원이니까 감당해야 할 몫이겠거니 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일하니 스트레스가 없었다. 물론 가끔 현타와 자괴감(경력이 몇인데 이런 피드백을 받아야겠니?)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그깟 자괴감 좀 든다고 안 죽는다. 일이 내 삶을 잠식해 버리게 두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란 사람의 성실함과 책임감이 이토록 얇고 가벼운 것이던가. 그럼에도 프로젝트는 무사히 마쳤고, 내가 아닌 내부 직원들의 따스한 배려와 고생으로 성과 목표는 달성되었다. 그리고 십수 년을 함께 일하던 직원을 해고한 후에 해당 팀은 해체되었다.







발리에 디지털 노마드가 많다더니 정말 어딜 가나 노트북 펼쳐 놓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블로그로 돈을 벌어본 경험이 있다. 5만 원. 그 돈은 쓰지 않고 뒀는데 그 이후에는 영 재미를 못 봐 흥미를 잃었다.


최근에는 직장보다 넓은 개념에서의 일을 생각한다. 언제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 더 이상 회사에 다닐 수 없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런 소득 없이 보낸 6개월 동안 실업급여가 아니었다면 정말 곤란해졌을 것이다.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지내고 싶어서 받은 대출 이자는 헉소리 나올 정도로 높아졌고 생각보다 나 1인에게 들어가는 생활비는 만만찮았으니까.


어찌 됐든 당장은 회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로 돌아가도 곧 닥칠 은퇴 후를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결국엔 누구도 나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가 올 테니까.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팀에서 가장 고연차였던 직원은 회사의 해고 대상자 1순위였던 모양이다. 모두들 충격을 받았고 분위기는 급격히 어수선해졌다.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와서, 고용 계약으로 이어지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팀이 해체됐으니 나를 뽑은 팀장님은 파트장으로 강등되었다. 한번 맺은 인연은 계속 이어가는 편이다, 라며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날 위로하려는 말인 걸 안다.


그렇게 두 군데 지원한 회사에서 1군데는 최종 합격, 1군데는 면접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끝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는 나는 지금 발리고, 면접 결과가 어떻게 되든 최종 합격한 회사가 있느니 조급할 것도 없다.  


솔직히는 뭐가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한국에 돌아가서 생각하기로.


여기는 발리, 나는 지금 평화 가운데 있으니까.






발리에 왔으면 꼭 먹어 봐야 한다는 폭립 전문점, 너티 누리스 와룽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다. 가는 길은 sari organic road를 걸어 나가 고젝을 타야지.


라이스 필드를 따라 산책(이라 부르고 더위 먹는 지름길)하며 나가다 보니 이 좁은 길에서도 많은 오토바이를 만난다. 길이 좁아 한쪽 편에서 기다려 주면 대부분 고맙다고 인사하고 지나간다. 짬뿌 한 트래킹 못지않게 라이스 필드 트래킹도 좋았다. 먼 거리는 고젝을 타지만 바이크로는 겪기 어려운 경험을 걷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여행지에선 되도록 걷는 편이다. 다만 발리는 정말 더워도 너무 더워서 바이크를 타는 비중이 좀더 크다.



@너티 누리스 와룽 우붓 Naughty Nuri's Warung
@폭립과 스팀 라이스 & 코크
10. tip for traveling in bali
*지점명: 너티 누리스 와룽 우붓 Naughty Nuri's Warung
*총평: 미안해요. 왜 맛집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장점을 말해 보면 고기에서 잡내는 거의 안 나요. 냄새에 정말 민감해서 잡내가 났다면 아마 거의 못먹었을 텐데 2조각은 모두 먹었음. 나머지 1조각은 너무 질겨서 그대로 남겼어요. 양이 꽤 많아서 혼자서는 다 먹기 힘듭니다. 밥과 같이 먹으면 나쁘지 않게 한끼할 수 있지만 리뷰처럼 극찬할 맛은 아닙니다. 위생은 정말 많이 내려놓고 가야 해요. 제 기준 찐 로컬 느낌 나는 위생.
*총점: 2.5점(5점 만점)



다음 코스는 ambar. 우연히 검색하다 본 칵테일 바인데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가야할 곳 리스트에 넣었었다. 폭립도 소화시킬 겸 걸어가기로 했는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구글 20분이 2시간은 족히 되는 듯한 기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끝없이 걷다 보니 마침내 등장한 철문. 응? 철문이요? 들어가려는데 경비가 삼엄한(?) 입구의 경비원이 이름을 묻는다. 여기가 어디로 가는 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그냥 경치 좋은 바에서 우붓의 마지막날을 장식하려는 관광객 나부랭이에요. 전혀 위협적인 인물이 아닙니다만?


어리둥절하지만 그래도 대강 이름을 말해 주니 이리로 가란다. 이리가 어딘데요.. 왜 이렇게 뭐가 복잡한데요..?


정문에서 “나는 단지 ambar에 가고 싶었을 뿐이야, 여기 고급 리조트에 딸린 bar니? 내가 고급 호텔 라운지에 이 꼴을 하고 온 거니??”라고 물으니 노 프라블럼이란다. 호텔 이름을 말해 주는데 한없이 긴 이름의 반도 못 들었다.


알고 보니 암바 ambar는 리츠 칼튼 호텔 만다파 litz calton hotel mandapa의 lounge bar로, 호텔은 삼엄한 경비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1박에 200만 원이 넘는 곳이었다. 하하. 이 꼴을 보고도 안 쫓아내고 친절히 맞아줘서 고오맙다.


@쏘 삼엄한 입구
@네.. 저는 이꼴을 하고 갔어요. 저 바지 5천 원


그나저나 정말 미쳐버린 게 아닌지 모르겠는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긴 정말 강추! 가강추!


자리에 앉아서 호텔을 검색하다 보니 내가 이런 호텔에 올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1박에 다른 나라 여행은 거뜬할 비용으로 이런 천국에서 묵을 수 있다면 한 번쯤은 시도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다지 의미 없는 고민에 빠졌다.



@mandapa at UBUD
@yuzu negroni
@ambar at ritz calton mandapa
@천국이 있다면 여기인가요?


오늘이 우붓에서의 마지막 밤이다.(이 말만 오늘 백 번 한 듯) 정말 아쉬워 미치겠네. 뭐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르고 벌써 떠나는 날이 오다니. 첫날 생경한 분위기에 어리바리하던 게 엊그제 같다.


꼭 다시 올게. 그땐 좀 더 안정된 나로. comfortable AHN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 돌아올게.


엉엉, 눈물이 난다. 하지만 난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지.(아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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