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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붓을 떠나 사누르로

09. UBUD_day8

나는 환경을 바꾸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길, 익숙한 사람들을 떠나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건 내게 꽤나 큰 다짐을 필요로 한다.


이토록 안정형인 내가, 오래된 직장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친 건 대단한 일이다. 낯설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오늘 조식을 먹는 이 자리도 그렇다. 3일 내내 앉았던 자리에 자연스럽게 또 가는 나를 직원이 말렸다. 오늘은 저기 가운데 예쁜 자리에 앉아 보는 게 어때?(사실 자리 준비가 덜 된 탓이었지만)


미심쩍은 기분으로 앉아 있자니 썩 편하지가 않다.


낯선 곳을 불편해하는 나는 최대한 빠르게 주변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래서 여행지에 가면 체크인만 하고 바로 튀어 나가 ‘걸어서’ 동네 주변을 산책(이라 부르고 탐색)한다. 길이며 주요 편의시설(편의점, 유명 카페, 맛집 등)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마음이 좀 더 편해진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내가 안정감을 ‘정보’로부터 얻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그렇게 익숙해진 두 번째 동네를 떠나려니 너무 아쉽다. 언제 다시 오게 될까. 그땐 지금보다는 조금 더 편히 지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마지막 날이니 분주하게 보내기보다는 정글 뷰가 아름다운 숙소에 누워 게으름을 피웠다. 곧 사누르로 간다. 거기에는 또 어떤 낯섦이 있을까.


@넘나 무대 정중앙에 혼자 앉은 자리






용케도 좁은 도로를 잘 다닌다 했더니만 사누르로 오는 길에 작은 접촉 사고가 있었다. 마주 오던 차가 빠르게 지나가면서 내가 탄 차의 사이드 미러를 치고 간 것. 아, 시간 좀 걸리겠다 했는데 그대로 가면서 손으로 쓱쓱 두드려 사이드 미러를 고치면서 달린다(??).


도착해서 자동차 괜찮냐고 물으니 노 프라블럼이란다. 뭐가 노 프라블럼이에요. 사이드 미러 달랑거리는데요.


뭐든 여유 있고 느긋한 건 인도네시아인들 특징인가. 베키도 늘 내게 no problem.이라고 했다. 나로서는 꽤 심각해 보이는 일에도 늘 노 프라블럼이었다.


14년 전, 내가 지내던 인도네시아 기숙사에는 건장한 가드들이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무섭게 저게 뭐람, 했는데 무서운 건 그들이 아니라 바깥사람들이었다.


거기엔 주로 호주에서 온 학생들, 골드 코스트, 퍼스, 브리즈번 그리고 시드니에서 온 우리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우리는 시드니에서 온 한국인들이었다.


한 번은 우리 학교 학생이 엄격한 규칙을 어기고 밤에 무단 외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쩐지 밤에 개가 짖고 어수선하더라니. 그 밤중에 도대체 뭘 한 건지 알고 보니, 아 정말 한심한 얘기인데 그들의 프라이버시 존중차 모든 얘기를 적진 않겠다. 다만 외출한 사람은 둘이었고 남녀 한쌍이었다는 점만 밝혀 두겠다.


주민들이 고된 노동에 마약을 하는 게 일상인 동네에서 한밤 중에 돌아다니다가 누군가에게 잡혔고 정글 칼로 위협하니 놀란 남학생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다 못해 숙소에 숨겨둔 돈까지 가져다준 것이다. 제발 여자만은 건들지 말아 달라며 다 털어준 돈이 2,000불이 넘었다. 그렇게 큰돈(당시 숙박과 식비는 선입금으로 지불하고 사비는 100불 이상 소지하지 않는 것이 규정이었다.) 왜 가지고 있었는지부터 이해가 안 갔고 그 이후의 대처는 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숙소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다. 거짓말이었다. 그들이 룰을 어기고 한밤 중에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였다. 나는 학생 리더로서 당시 학교가 준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문제로 한동안 정말 머리가 아팠다. 그들을 호주로 돌려보내는 게 나을지 아니면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게 나을지 고민되는 한편,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스태프들, 아니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사실이 못견기게 괴로웠다. 어떻게 그런 멍청한 행동을 할 수 있지?


그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 위험에 빠지는 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멍청한) 사람들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위험에 빠지는 게 인도네시아 스태프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째서,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야. 왜 너희 때문에 내 친구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해!


그 때문에 내 친구 베라 Vera는 임신한 몸으로 길 한복판에서 위협을 당했다. 기숙사에 묵는 외국인들이 돈이 많다고 동네에 알려진 것이다. 나는 분노했다.


어째서 그런 무책임한 짓을 한 거예요? 한밤 중에 무단 외출을 한 것도 모자라 100불 이상 소지하지 못하도록 한 규칙을 어기고 강도에게 2,000불도 넘게 주다니. 제정신이에요?


인도네시아 스태프들은 내게 단지 스태프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친구들이었다. 우리야 얼마간 머물다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은 그들은 계속해서 위협에 시달리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도 속 좋게 웃고 있는 꼴을 보자니 알아서 하라고 강도에게 도로 데려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내게 베키는 그들을 용서하라고 했다. 자신도 그렇게 했다고.


난 정말 멍청하고 무모한 사람들이 싫었다. 우리 때문에 위험에 빠진 내 친구들이 너무나 걱정됐다. 그럼에도 웃으며 no problem. 이라던 베키. 나중에서야 나는 그 말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전혀 no problem. 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누르의 숙소는 저렴하지만 해변가와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홈스테이로 잡았다. 1박에 3만원이 채 안 되니 근사한 시설이나 서비스는 기대하면 안 된다. 다만 수영장이 앞에 있어 습하고 사생활 보호가 안 된다는 1층 대신에 2층으로 방을 받았다. 또 근처에 대형 마트가 있어서 일찌감치 들러 사 가지고 갈 것들을 봐 두었다. 가성비 좋은 숙소임에는 틀림없는데 시설이 조금 낯설었다. 마지막 밤인데 하얏트나 안다즈로 옮길까 싶기도 했고.


일단 배가 너무 고파서 짐만 대충 풀어 놓고 밖으로 나왔다. 점심은 ‘강남’이라는 한식집에 갔는데 발리산 흑돼지와 밥, 빈땅을 배부르게 먹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반찬까지 남은 게 없었다.


해변에 가기엔 너무 뜨거워서 근처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이 집 카페 라테 잘하네.



@sala bistro & coffee


화장실도 깨끗하고 라떼도 맛있어서 마음에 쏙 든 집이다. 커피도 저렴한 편. 여긴 우연히 지나게 되면 또 들러도 괜찮겠다.





오늘은 사누르로 온 첫날이니 무리하지 않고 해변가를 거닐다 해지기 전에 들어갈 예정이다. 숙소가 골목 한 가운데 있어서 해지면 정말 무서울 것 같거든.


홀로 여행객은 안전에 정말 민감해진다. 새삼 원지의 하루나 유명 여행 유튜버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배낭 하나 메고 온갖 곳을 다 다니던데 용기가 엄청나.


확실히 사누르는 우붓과 다른 분위기다. 일단 바닷가고, 산책로도 잘 닦여 있어서 혼돈의 카오스 속을 걷는 것 같은 우붓 시내에 비해 쾌적하다.


바닷가에 앉아(온통 고급 리조트의 베드들 뿐이지만 옆에 맨바닥도 있긴 하다. 나는 지금 아라비안 나이트를 떠오르게 하는 5천 원짜리 바지를 입고 해변가의 고급 리조트 옆 맨바닥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너무 귀여워 증말)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자니 그간 거쳐간 바다들이 구남친 마냥 아련하게 떠오른다. 자니..?


강릉 안목 해변, 금능 해변, 함덕, 세화, 이호 해변과 괌의 투몬 비치까지.. 바다를 보면 생각이 없어진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 같달까.


저멀리 낚시꾼이 서서 낚시를 한다. 가만? 저긴 바다 한 가운데인데?


무섭지도 않나. 생각해 보니 물을 무서워하는 건 나다. 저분은 물과 함께 사는 삶이겠지. 호텔 수영장을 혼자 ‘걸어’다니다가 현타가 와서 수영 강습을 다녔었다. 자유형은 끝끝내 마스터하지 못했고 평영은 반에서 제일 잘했다. 뭐든 배워 두면 좋다고, 우붓 호텔 수영장에서 한껏 수영하며 놀았다. 대신 물 밖으로 나와 숨쉬는 건 못해서 멀리는 못갔다.


그래도 물에서 ‘놀 수 있다’는 게 어디야.


물을 무서워해서 스노쿨링은 꿈도 못 꿨었다. 친구와 간 괌 여행에서 돌핀 크루즈를 용기내 신청했다. 정말 용기를 낸 게 맞다. 비록 안전줄을 한 번도 놓지 못하고 줄만 졸졸 따라 다녔지만 그래도 정말 잊지 못 할 기억이다. 마치 거대한 수족관 속에 들어온 기분. 정말 꿈만 같았다. 수영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내 인생에 없었겠지.


물은 여전히 두렵지만, 언젠가 꼭 극복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물 안 먹고 숨쉬는 거 어떻게 하는 거야 정말.


산책로에 하얏트며 안다즈며 고급 호텔들이 줄지어 있어서 지나가면서 구경했는데 안 가길 잘한 것 같다. 한국인이 정말 많다. 정말정말 많다.


외국에 나와서 한국인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해외에 나왔으니 이왕이면 외국인과 좀더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싶은데 또 한국인이라니 이럴 거면 호캉스나 하지 왜 해외에 나왔나 싶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탓이 아니다. 아마도 그들도 나를 보면서 또 한국인이네, 할 지 모를 일이고.


그냥 이왕 나왔으니 영어를 잘하든 아니든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바람이랄까.


@1박에 4만원짜리 묵다가 보니 으리으리한 안다즈





내일 아침에 가 보고 싶은 카페를 정하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본다. 카페에서 어찌나 졸리던지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다.


그나저나 이 숙소는 방음이 정말 최악이다. 옆방에서 화장실이나 발코니에 나갔다 들어오는 소리가 마치 내방에 있는 듯이 고스란히 다 들리네. 힝, 마지막 날 숙소는 조금 투자를 했어도 괜찮았겠다.



@사누르에서의 첫날 밤, 이런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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