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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님, 취향을 가지셔야 합니다

10. 슬기로운 직장 생활

나른한 오후. 사무실이 제법 소란했다. 들리는 말을 종합해 보니 타 팀에서 절차를 밟지 않고 업무 협업을 요청한 게 문제였다.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해야지 무턱대고 와서 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내가 관련된 일도 아닌데 잠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주 '절차'에 대해 투덜대는 직원 K은 이렇다 할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가 뭘 좋아한다거나 인상 깊었다거나 재미있었다는 경험을 들은 적이 별로 없다. 한 번은 밥을 먹다가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도 무척 흥미진진하게 들렸다. 아직 유럽을 가 보지 못해서 특히 유럽에 대한 얘기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옆에서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K는 자신도 파리에 가 본 적이 있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왜일까. 그의 얘기가 영 흥미롭지 않았던 것은. 가이드가 찍어 준 곳을 빠르게 다녀온 패키지여행이라 그랬을지는 몰라도 그의 여행기에는 '취향'이 묻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혼자서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마신 맥주 맛을 잊지 못하겠다고 했고, 나는 발리 짱구 비치에서 본 석양을 핑크빛이라 정말 황홀할 지경이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대만에서 먹은 음식이 너무 고약해서 물에서도 향신료 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고 하는데 K는 사실 위주로, 다녀온 곳을 나열할 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끔씩 생각하는 건 '취향'이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취향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와 오색빛깔 찬란한 색들이 살아 숨 쉬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도 좋은 영향을 받는다.


주말에 만난 친구가 그랬다.


친구는 운동에 푹 빠져 살고 있었다. 왜 자세가 제대로 안 나오는지, 어떻게 하면 원하는 곳에 근육을 키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잠시 서로의 회사에 대해 푸념하기도 했지만 이내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공유했다. 우리의 대화는 각양각색의 생기 넘치는 취향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좋아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빛이 난다. 뭘 해도 '나쁘지 않아.' '그냥 그렇네 뭐.' '다 비슷하지.'라고 말하는 사람의 세상은 아마도 색이 바래 있을 것이다. 우울증에 걸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나의 20대가 그랬다.


하기 싫은 일이 있을 수 있다. 때론 어려운 일도 만난다. 그럼에도 그 일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이랬어야만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름다운 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보내기엔 세상에 좋은 것이 너무 많으니까.


취향이 있는 사람은 일에만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일에서만 취향을 찾아서는 안 된다. 인생을 찬란한 색으로 빛나게 만드는 것은 내 몫이다.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고 싶다거나 뭐 이런 생각이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죽을 때 후회가 남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중에 인상 깊었던 글 중 하나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책이었다.


죽기 전에 후회되는 것, 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에 단 한 사람도, 정말 뜻밖에 단 한 사람도 '일을 좀 더 열심히 할 걸'이라는 대답은 없었다. 대부분이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지 못한 것' '나를 더 잘 돌보지 못한 것'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너무 많이 주저한 것' 등을 꼽았다. 이 얘기는 좋은 힌트가 되어 주었다.


나는 선택하기 어려운 순간에 종종 '마지막 날'을 상상해 본다. 죽기 직전 침대에 누워(제발 침대에 누워서 갔으면 좋겠는데!) 하는 떠오르는 생각이 뭘까. 이 일을 한 걸 후회할까, 하지 않은 걸 후회할까. 이 질문은 늘 선택을 도와준다. 그렇게 선택한 일은 대부분 후회가 없었다. 취향을 찾는다는 건 이런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일. 나를 기쁘게 하는 일. 내 인생을 좀 더 생기 있게 만드는 일을 선택하는 것.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내게 달렸다.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시간 동안 내 생각에만 갇혀서 그게 뭐든 '그저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경험이 쌓인다는 건 그런 거 아닐까. 뭘 해도 별 감흥이 없어지고, 다 해 본 거고, 안 해 본 일이어도 비슷하겠지 뭐, 하고는 귀찮아하게 되는 것. 모든 게 뻔해 보이고 그 맛이 그 맛일 것 같고 그 풍경이 그 풍경일 것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은 세상엔 여전히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너는 뭘 좋아해?라는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취향을 가지려면 그만큼 폭넓게 경험해야 할 테니까 지금까지 안 해 본 것만 하고 살아도 부족하다.

그러니 '절차를 밟았니 안 밟았니' 같은 어쩌면 하루만 지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건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삶에 생기는 모든 일을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취향에 맞는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게 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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