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눈여겨 보던 이미지 혹은 스타일에 관한 짧은 토막글. 규칙은 아래와 같다.
1. 이미지의 종류와 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2. 내용과 형식을 제한하지 않는다.
3. 한 시간 이내에 쓴다.
나의 일러스트 취향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작가의 타임라인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유려한 선과 차분하면서도 강한 색감이 내게는 항상 그리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형상들 보다는 곡선과 직선이 합쳐져 마치 색종이를 자른 것 같은 추상적인 형태들이 좋다. 색은 항상 일관되게 차분함을 유지한다. 내가 볼 때는 작가가 다른 색 보다도 특히 블랙을 탁월하게 쓴다. 그가 만드는 블랙은 우리가 항상 보는 ‘그’ 블랙, 즉 ‘강하고, 노멀하며, 특징 없고, 무표정의, 멋있는, 강렬한’ 블랙이 아닌,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색감 위에 위치하면서 눌러진, 가라앉은, 복합적인 색상의 합이다. 그의 그림에서 블랙은 그림 위에 올려진 문진 같다.
그리스와 마티스의 조형성을 갖고 있는 그의 그림이 내게 올드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 둘의 조형성을 꾸준히 좋아하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그림이 평면성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유로운 곡선이 주를 이루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항상 기하학 도형들이 슬쩍 함께하고 있다. 원과 정사각형이 그렇다. 자유로운 곡선과 함께 하는 기하학 도형은 우리에게 컴퓨테이셔널 그래픽을 연상시킨다. 손이 아니라 컴퓨터로 그려진 도형이라는 암시이다.
몇 년째 그래픽디자인 스타일의 큰 축 중 하나는 평면성이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그렇다(이 평면적 디자인의 기원이 바우하우스라고 해도 이 스타일을 계속 1910년대의 연계선상에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평면성이 유행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평면성과 동시대성이 맞닿고 있다는 것이고, 더 강력하게 말하자면 평면성이야말로 동시대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그래픽 요소라고 까지 말하고 싶다. 그래픽 디자인의 90% 이상이 어도비로 대표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하루에 3~4시간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의 UI, 컴퓨터 프로그램들, 과격하게는 이미지의 특징이 어떻든 결국엔 디스플레이에 송출된다는 점 등등의 영향일 것이다. 3D 기술이 지금과 같이 발전하기 전엔 입체감과 공간감을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하느냐가 관건이었다면, 지금은 디지털의 평면성을 리얼하게 표현하기, 현실마저 납작하게 만들어 디지털에 편입시키기가 관건이라는 생각이다. 이 글에선 이 정도로만 해두고 조금 더 고민한 뒤 심층적으로 써보도록 해야겠다.
https://www.tiktok.com/@tinkerprincess0/video/6702870335009590534
사람을 본뜬 캐릭터를 본뜬 사람 : 1934년, 85년 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모션은 실제 배우의 움직임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Sleeping Beauty - Live Action) 85년 후 2019년의 사람(@tinkerprincess0)은 디즈니의 캐릭터의 모션을 그대로 따라서 움직인다.
24fps : 어디선가 들었는데 디즈니의 영상이 더욱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이유는 다른 애니메이션보다 더 많은 초당 프레임 덕분이라고 한다. 보통 애니메이션이 초당 18~19 프레임이라면 디즈니는 초당 24프레임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tinkerprincess0는—실제가 어떻든— 초당 24프레임의 움직임을 갖는다.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한 유튜브에 따르면 실제 인간의 눈은—완벽히 프레임으로 계산하긴 힘들지만— 밝기에 따라 18~100 프레임까지 유동적이라고 한다)
ease in ease out : 디즈니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움직임에서 중요한 건 ease in/out이라 불리는 모션이다. 예를 들어 공이 굴러가기 시작할 때는 천천히 움직이다가(ease in) 점점 가속도가 붙고, 공이 멈출 때는 다시 점점 감속(ease out)한다. tinkerprincess0의 모든 움직임과 표정은 ease in으로 시작해서 ease out으로 끝난다. 그뿐 아니라 1930년대 디즈니 스튜디오에 의해 개발된 애니메이션 움직임의 12가지 법칙을 모두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법칙들을 소개하는 영상의 제목은 재밌게도 The illusion of life이다. (https://vimeo.com/93206523) @tinkerprincess0의 움직임은 The realization of illusions 가 된다.
십 년 동안 강화되어왔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명징해진 비주얼 디자인에 대한 인상.
비주얼 디자인이 이제는 결코 하나의 작품, 하나의 이미지로 완결성을 갖지 못한다는 생각. 시리즈로서, 여러 시리즈의 종합으로서만 이뤄지며 완결이 아닌 증식하는 코드로 존재. 여러 권의 책, 여러 테마로의 변주, 한 테마에 있어서도 여러 색으로의 변주. 한 색에 있어서도 여러 조합으로의 변주. 인스타그램 피드의 특성일 수도, 핀터레스트나 비핸스를 거치며 발생하는 특성일 수도. 그 자체가 현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게 가장 설득력 있을 듯.
집합과 변용으로 존재하는 이미지. 그로써(그제야) 힘을 갖는 이미지. 끝없는 불안정성 위에서 영원히 증식하는 디자인-이미지의 각성 상태가 야기하는 피로감. 레트로 유행이 그랬듯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모던 디자인으로 회귀해 안정을 취하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들은 픽셀이 보일 정도로 확대된 이미지, 텍스쳐만 남은 이미지로 대체되거나 이미지 속 정보 값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끝없는 증식은 붕괴될까 아니면 모두를 질식시키고 새로운 미감을 장착한 새로운 인간상을 획득할까.
이런 현상 속에서 나는 어디에 위치해야 하나. 스펙터클에 빠질 수도 레트로로 돌아갈 수도 없다면.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다면.
재작년부터 가장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 일명 satisfying video 계열의 랜더링 시뮬레이션 이미지. 파스텔 톤과 흠집 하나 없는 재질의 특성을 강화한 표면.
상업적(고해상)이고 키치적(자본주의적 생생함)이며 풍부한 이미지. 편리하게 조정된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이미지. 모든 것은 순리대로(시간의 흐름과 조정된 물리법칙에 따라) 흘러가고 굴러가는 물체는 정확히 계산된 구멍에 떨어지며 개체들이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절대 부딪히지 않는다.
관람자가 할 일은 오로지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기. 숨은 뜻, 의미, 역사, 메시지 없이, 정확히 계산된 움직임 속에서 오로지 흘러가기만 하는 이미지. 보면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미지.
고해상도 이미지는 확실히 빈곤한 이미지보다 더 화려하고 인상적이며, 더 그럴싸하고 마술적이며, 더 두렵고 유혹적이다. 말하자면 더 풍부한 것이다.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4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