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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현 Jan 07. 2021

005~010

평소 눈여겨보던 이미지 혹은 스타일에 관한 짧은 토막글. 규칙은 아래와 같다.
    1. 이미지의 종류와 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2. 내용과 형식을 제한하지 않는다.
    3. 한 시간 이내에 쓴다.


006.

극단적인 굵기 대비를 가진 영문서체


작년까지는 극단적으로 굵은 heavy 타입 폰트가 많이 보였던 반면 2020년 들어서는 아주 굵다가 갑자기 얇아지는 폰트가 자주 눈에 띈다. 성당에서 볼 법한 올드한 셰리프 핸드라이팅 서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타이포는 굵기 대비가 심해서 보는 사람의 긴장감이 흐름에 따라 널뛰게 된다. 아주 굵을 때 긴장했다가, 유려하게 이어지는 곡선에서 풀리고, 예리하고 날카로워지는 부분에서 다시 긴장. 굵기와 곡선 혹은 직선이 어떻게 긴장의 흐름을 만들어내는지가 이런 서체의 포인트다.





007.

<시공간>의 인테리어


내가 처음 시공간을 본 건 버스를 타고 종로를 지나가던 저녁때였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화들짝 놀라 창문을 붙잡고 뒤돌아봤다. 뭘 하는 곳이길래 천장까지 똑같은 크기의 진열장이 올라가 있지? 몇 주가 지나서야 그곳이 액세서리 가게라는 걸 알아챘다. 잠깐 검색해보니 한약방 콘셉이라고 하는데, 그럼 이 스타일의 유래는 최근 을(힙)지로의 복고풍 유행에서 유래했다고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몇 달 뒤, 똑같이 카피된 매장이 대학로에만 두 군데 이상 생겼다.

이 인테리어가 이토록 유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을지로풍 유행이라고 하기엔 정사각형 패턴의 나열이 복고(한약방) 보다는 몇 년 전 화제를 모았던 별마당 도서관의 변주처럼 느껴진다. 수없이 많은 물건—소비 가능성—의 축적.

이 축적의 이미지는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포드주의가 포스트 포드주의로 이행되면서 갖게 된 작은 선택의 자유를 생각해보자면, '대량생산에서 나오는 풍요와 획일감'이 '형식적 통일 안의 선택의 다양성으로 인한 풍요와 만족감'으로 아주 약간 바뀌었을 뿐인 것 같다.

상품의 다양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 시각적·심리적 피곤함이 그에 비례해 늘어나게 되는데, 디스플레이 형식의 통일이 이러한 피곤함을 어느 정도는 감소시킨다. 고를 수 있는 물건이 다양하게 끝없이 늘어져있으면서 언제나 업데이트되고, 모두 정갈하게 정리되어 칸마다 하나씩 들어차 있는 공간. 시공간은, 더 넓게 물건 축적의 이미지는, (물건의 질이나 실제로 다양한지와는 상관없이) 소비자로서 자아에게 완벽한 유토피아일 것이다.





008.

사물이 주인공인 세계

어느 날 그 건물 아래로 밧줄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이 하나씩 건물을 빠져나갔다. 밧줄은 아주 오래 매달려 있었다. 가느다란 외줄이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그 후 그 건물이 완전히 철거되었을 때 밧줄은 사라졌다. 더 이상 밧줄을 타고 내려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 이수명, <밧줄> 중 일부

사물이 주인공인 세계에서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어떤 종류의 안정감이냐면 존재가 존재 자체로 있다는 안정감. 그냥 그대로 거기에 있는 것의 안정감. 어떠한 가치 판단 없이, 누군가의 의도도 연출도 호오도 없이. 덩그러니. 우연히 그 자리에.

‘리얼리티’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일정치 않은 어떤 것, 다분히 의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보일 겁니다. 때로 먼지투성이의 길에서, 때로는 거리에 떨어진 신문 조각에서, 때로 햇빛을 받고 있는 수선화에서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또한 방에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비춰 주고, 어떤 우연한 말 한마디에도 강한 인상을 받도록 합니다. 그것은 별빛 아래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누군가를 압도하여 그 고요한 세계를 대화의 세계보다 더 리얼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 리얼리티가 손대는 것은 무엇이든지 고정되고 영원해집니다. … 그 이후로는 사물이 더욱 강렬하게 보이지요.
— 버지니아 울프

+사물이 주인공인 음악이 있을 수 있을까?


@qinxione


009.

시각적 피곤함 탈출하기


앞의 글에서 계속해서 키워드로 나왔던 시각적 각성 상태가 야기하는 피로감. 레트로 유행이 그랬듯 모던 / 레트로 디자인으로 회기해 안정을 취하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것.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들은 픽셀이 보일 정도로 확대된 이미지, 텍스쳐만 남은 이미지로 대체되거나 이미지 속 정보 값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끝없는 증식은 붕괴될까 아니면 모두를 질식시키고 새로운 미감을 장착한 새로운 인간상을 획득할까. 이런 현상 속에서 나는 어디에 위치해야 하나. 스펙터클에 빠질 수도 레트로로 돌아갈 수도 없다면.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다면.

이런 피로감 때문에 필름 카메라. 50mm 화각이 담는 좁은 공간, 낮은 선명도와 과노출 혹은 노출 부족으로 디테일을 포기하고 안정감을 얻는다. 어쩔 수 없음에서 오는 편안함. (DSLR로 찍은 raw파일은 노출이 맞지 않았을 때도 날아간 부분을 살릴 수 있는 반면 필름 카메라는 날아간 부분을 회복하기 어렵다)


오늘날 필름의 부드러운 온기가 주는 친밀함은 (인간의 눈이 필요로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세부적인 것을 포함하는) 시각 정보가 넘쳐나는 차갑고 매끈한 디지털 이미지와 비교된다.
— 디지털 격차: 동시대미술과 뉴미디어, 클레어 비숍




010.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의 표지


달걀과 닭의 표지는 커다란 책을 넘치도록 뒤덮은 중년 여성의 무표정한 응시로 채워져 있다. 꽉 채워진 작가의 얼굴은 어디서 봐도 눈에 띌 수밖에 없도록 강렬하다. 문득 어두운 곳에서 마주친다면 무섭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의 표정은 무정하고 무심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집요해 보인다. 한껏 올라간 갈매기 모양의 얇은 눈썹, 눈과 눈썹 사이 움푹 파인 그림자, 두껍고 강하게 그린 아이라인, 꾹 다문 입, 전체 형태를 알 수 없지만 거칠게 굴곡진 머리카락. 전체를 본다면 사자 갈기 같은 모습일 거라 상상한다. 길고 잘 정리된 손톱, 뒤표지로 이어지는 얼굴을 받치고 있는 손, 엄지와 검지를 올려서 얼굴을 만지고 있다. 마치 앞의 물체를, 사람을 유심히 보는 듯하다. 혹은 뚫어져라 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관찰하는 여성의 얼굴. 표지를 보는 나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관찰당한다. 혹은 관통당한다.

‘두 세계를 자신 안에 폭탄처럼 품고 있으면서, 마치 장미와도 같은 완벽한 아름다움과 균형을 추구하지만 어느 날 필연적으로 내면의 파열을 겪게 되는 젊은 중산층 기혼 여성’의 얼굴.
- 위의 책,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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