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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monnamegirl Jul 29. 2020

둘째의 서브웨이 레시피

손윗형제로부터 취향을 물려받은 동생들의 반란




올 생일은 썩 유쾌하지 않은 생일을 보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오빠였다.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던 와중에 오빠가 생일을 잊고 새벽에 들어와서 케이크도 자르지 못하고 생일을 끝냈다. 그다지 살가운 오누이 사이는 아니지만 안 보고 지내면 지냈지, 같은 지붕 아래에 살면서 그렇게 행동하니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다. 그래서 뭐라고 사과하나 보자, 그런 마음으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벼르고 있었는데...


다음 날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는 내게 오빠가 다가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짧은 편지와 함께 현금이 잔뜩 들어있었다.


이대로 풀면 너무 속물 같나 싶긴 했지만 오빠는 이미 내게 봉투를 줬고, 나는 어차피 화를 풀 거고, 그렇다면 서로 기분이 더 상하지 않게 지금 화를 푸는 편이 합리적이고. 그래서 방에서 나가 오빠에게 위시 리스트에 넣어뒀던 시계를 보여주었다. 어떤 색깔이 제일 이쁘냐고 물어보면서.


그렇게 산 시계가 이거. 사실 오빠(를 비롯해 물어본 친구들 모두)는 은장을 추천했지만...

한 달 전에 산 시계 자랑을 갑자기 하는 이유는 오늘 낮에 오빠가 전화를 걸었던 일 때문이다. 별 건 아니고, 내가 맨날 사 오는 서브웨이 조합이 뭐냐는 전화였다. 가끔 엄마가 자전거를 타고 퇴근길 마중을 오는 날이 있다. 그러면 따릉이를 타고 같이 집에 가는데 그날은 꼭 서브웨이에 들린다. 엄마가 오빠 꺼까지 사라고 시키면 오빠 취향을 알지만 귀찮은 나는 그냥 내가 먹는 것을 똑같이 산다. 그런데 몇 번 내 레시피를 먹은 오빠가 본인은 맛 조합을 하기 어려워서 이탈리안 BMT만 먹는데 내가 사 오면 맛있다고 감탄을 하더라. 그러고 오늘 서브웨이에 가서 주문대를 앞에 두고 내게 전화를 한 거였다. 어떻게 주문하냐고.

이 별 것도 아닌 일화가 내게 신선한 이유는 둘째로서 나는 어릴 때부터 오빠한테 음식 취향을 세뇌당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나쁘게 말하면 그렇고, 좋게 말하면 내 입맛은 오빠가 만들었다. 라면은 너구리가 맛있고, 과일 주스는 오렌지보다는 포도가 맛있고, 과자는 시리얼이나 아몬드 빼빼로가 최고. 엑설런트는 파랑이, 셀렉션은 초코. 김밥은 참치 미만 잡. 오빠의 기준에서 어긋나면 바로 '맛알못' 급행열차였다. 염통 꼬치나 쥐포 튀김을 좋아하는 것도 어릴 때 비디오 대여점에 다녀올 때 늘 오빠가 사줬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하자면 본인 먹을 거 사면서 나한테도 나눠준 거지만.) 어디 의탁한 취향이 입맛뿐일까. 내가 프라이탁이나 바버처럼 구리구리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도, 일본 만화가 중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를 가장 좋아하는 것도 오빠의 영향이다.


취향을 손윗형제로부터 물려받는 게 모든 동생의 특징은 아니겠지만, 내 친구들을 보면 나만의 특징도 아닌 것 같다. 내 오랜 친구 중에 언니의 옷 스타일을 닮은 친구도 있고 자신의 동생에게 개그톤을 물려준 친구도 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잘생긴 본인 형을 롤모델 삼는 그루밍족도 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인이 된 이후에는 나도, 친구도, 친구 동생도 손윗형제의 영향권 하에서 벗어났다. 아니, 오히려 그들로부터 리스펙을 받는 느낌이다. 오빠에게 입맛을 위탁하고 자란 내가 이제 오빠한테 서브웨이 레시피를 알려준다. 내가 본 사람 중 교복이 제일 잘 어울리던 친구 언니는 이제 뭘 입어도 부내나게 어울리는 동생에 감탄하고 개그맨처럼 웃긴 내 친구는 동생이 세상에서 제일 웃긴 사람이란다. 언니보다 옷을 잘 입고, 언니보다 웃긴 사람이 된 둘째들의 반란은 어디서 기인했을까. 물려받은 취향과 생존법으로 터득한 눈치, 그리고 형제자매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하면서 생긴 자립심의 콜라보? 그냥 내 주변 사람들에 한정된 우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더 이상 오빠가 은장 시계를 사라고 해도 은장 시계를 사지 않는다. 설사 그게 오빠가 준 돈으로 사는 시계일지라도 말이다. 자고로 검은 티셔츠에는 금장 시계 아니겠습니까. 물론 염통 꼬치랑 쥐포 튀김은 여전히 사랑한다. 그래서 방에서 몰래 먹어야 한다. 오빠가 뺏어먹지 못하게...



아, 가장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서브웨이 조합은

터키 샌드위치

파마산 오레가노 빵

슈레드 치즈

빵 굽고

토마토 올리브 피클 빼고 할라피뇨 많이

랜치랑 스윗어니언


이상 돈도 안 받고 쓰는 바이럴 냄새나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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