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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May 07. 2022

다시 산티아고로 - 8일 차

Walk with Dodo

8일 차


아스토르가 - 엘 아세보

오늘 걸은 거리 : 36.6km

걸은 거리 : 152.4km

남은 거리 :  228.7km





지금 걷는 길들은 이미 9년 전에 한 번 걸었던 길이긴 하지만,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기도 한 데다가, 당시 날씨는 걷는 내내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지겹도록 반복했기 때문에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 아래 보이는 풍경들은 마치 이 길들을 처음 걷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오늘의 원래 계획은 29킬로미터 정도 걸으면 만나는 만하린manzarin 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했다. 만하린은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부적절한 장소다. 모두가 떠나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가던 한 오스피딸레로(알베르게의 주인 혹은 자원봉사자)가 건물 하나를 개보수해서 알베르게로 만들었고, 만하린에는 그렇게 식당도, 카페도, 가게도 하나 없이 덩그러니 알베르게 한 채만 존재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뜬금없음이 마음에 들어서 들러볼까 했는데, 아스토르가에서 한 방을 썼던 스페인 할아버지 세 분은 내가 만하린으로 간다니까 절대로, 네버,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찬물밖에 안 나오고, 인터넷도 안되고, 아무튼 휴식을 취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그분들 앞에서는 알겠다고 했지만 마음은 이미 만하린에 가 있었다.





순례길을 시작한 이후로 매일 25킬로미터 내외를 걸어왔지만, 폰세바돈을 지나 만하린 근처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29킬로미터를 걸은 상태였고, 어깨와 발과 무릎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쉬다가 지나가던 젊은 독일 커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조금만 더 가면 철십자가(La Cruz de Ferro)가 있다는 것이었다.

5미터 정도 되는 나무 기둥 위에 올려진 철십자 상에는 독특한 순례자의 전통이 있는데, 순례자들이 집에서 가져간 어떤 물건을 이곳에 놓고 가는 행위를 통해 그들의 소원과 근심, 걱정 등에 대한 염원을 바라는 것이다. 나는 순례를 떠나기 전에 <walk with dodo>라는 프로젝트를 계획했는데, 인스타그램을 통해 100명의 참가자들을 모집했고, 그들이 제시한 단 한 가지 단어들-소원 혹은 고민에 대한-을 3미터가량 되는 포장용 끈에 하나하나 써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순례길을 직접 걸으며 운반해 철십자 기둥에 묶어놓고 오는 것이(내가 스스로 내게 부여한) 나의 임무였다.

그저 걷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폰세바돈 근처에 철십자상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만하린까지 왔는데, 그 중요한 임무를 생각해낸 덕분에 만하린이고 뭐고 일 초라도 빨리 철십자에 끈을 묶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만하린을 지나쳐도 7-8킬로미터 정도면 다음 마을인 엘 아세보에 도착할 수 있었고, 엘 아세보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마을이니 조금만 더 걸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 마음 덕분에 정말 힘든 하루가 되긴 했지만.





멀리서 철십자상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나 또한 나의 소망을 끈에 적어 넣었고,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들, 혹은 그만큼의 간절함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고민들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내게 전달할 때 그것을 고민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단어들을 받아 보았을 때 그 커다란 마음의 편린이 느껴져 괜히 숙연해졌던 것 같다.





철십자상 주변에는 몇몇의 순례자가 보였다. 기념사진을 찍는 순례자들, 집에서 가져온 무언가를 놓으려고 하는 순례자, 철십자상의 나무 기둥을 두 손으로 감싸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흐느끼는 순례자. 어쩌면 죽음과 관련된 사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충분히 눈물을 흘리고 철십자상을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가방에서 가져온 끈을 꺼내 고민 없이 철십자상으로 걸어갔다. 철십자상 주변에는 수많은 순례자가 가져다 놓았을 돌멩이들과 잡동사니, 누군가의 사진, 목걸이, 무수한 이름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것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돌무더기 위로 올라가 끈을 꺼내 들고 기둥 앞에 섰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바다같이 깊었고, 오후 4시의 햇볕은 적당히 따사로웠으며, 숲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과 가방 속에 오래 머문 탓에 이리저리 구겨진 끈을 나부꼈다. 나는 그렇게 양손에 끈을 들고, 잠시 눈을 감은 채로 그대로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 장소에 가득한 수많은 순례자들의 간절한 증거들을 목격한 덕택에 괜히 센티해진 것일 수도 있고, 내게 기꺼이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바라 마지않는 것에 대한 진심을 전해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간절함이 결국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 벅차오른 감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감았던 눈을 떴을  쏟아지는 강한 햇살에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고, 땀과 눈물을 닦고서 나무 기둥을 껴안아 끈을 감아 묶었다. 나무를 껴안았을  햇볕에 데워진 나무기둥은 마치 살아있는 어떤 미지의 생명인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체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슬픔과 분노와 소원과 소망이  녹듯 녹아 어느 강물의 일부가 되고, 어느 바다의 일부가 되기를. 그리고 언제까지고 어디로든지 흘러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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