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스하이walker's high
9일 차
엘 아세보 - 카카벨로스
오늘 걸은 거리 : 30.7km
걸은 거리 : 183.1km
남은 거리 : 198km
오늘은 카카벨로스에 도착함으로써 내가 목적했던 거리의 대략 절반을 걸어온 셈이 되었다. 원래 계획은, 어제 무리해서 36킬로미터를 걸었으니, 오늘은 적당히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의 마을에 하루 머무는 것이었으나 오후 3시쯤 도착한 캄포나라야의 알베르게와 호스텔은 모두 만실이었다. 공립 알베르게가 없는 마을이기도 했고, 최근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순례자들의 숫자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았다. 결국 다음 마을인 카카벨로스까지 5킬로미터가량을 더 걸어 4시가 넘어서야 처음 눈에 띈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틀 연속 오버페이스로 걸어온 내게 스스로 주는 선물이었다.
이제 남은 거리는 198킬로미터. 걸어온 만큼 걸어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발과 어깨가 짊어지는 무게로 인한 고통에 내 몸에게 미안하기도 하면서도 여정의 절반이 이미 흘러갔다는 생각에 아쉽다. 그러는 동시에 하루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해 순례자 인증서를 받고, 대성당 광장에서 환호를 지르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을 나를 상상하게 될 만큼 이 길 끝에서 맛보게 될 결실에 대한 갈증에 애달프다.
매일 적게는 7시간에서 많게는 10시간을 걷는 동안 산티아고에 대한 갈증을 심하게 느낄 때마다, 나는 이 걷는 일이 내게 주는 행복의 정체와 걷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사실 하루 종일 길을 걷는 동안 하는 생각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면, 삶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나 어떤 진리에 대한 성찰 같은걸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 비슷한 것들은 걷기가 끝난 뒤,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알베르게의 햇볕이 잘 드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 블루투스 키보드와 드로잉북을 펼쳐놓았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럼 걷는 동안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일단 걷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어느 발이 더 아픈지, 그렇다면 걸음걸이를 균형 있게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한쪽 어깨가 더 아프다면 가방끈이 혹시 잘못되었는지, 스틱의 길이는 이대로 괜찮은 건지, 등산을 하는 동안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서 발과 스틱의 위치를 어디로 짚어야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을지, 언제 휴식을 취하고, 음식과 물을 언제 섭취하고 보충할지 등등. 그리고 거기에는 힘들고 아프고 덥다는 고통의 감각들이 필연적으로 단짝처럼 따라붙기 마련이므로 그들도 함께 상대해야 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순례자들의 밝은 인사와 호의, 마을 사람들의 미소, 배낭에 매달린 가리비가 짤그랑 거리는 소리, 푸드덕 날아오르는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 나지막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들이 스치며 만들어내는 사각이는 마찰음, 발아래에서 부서지는 작은 모래알들이 비비며 만들어내는 나의 발자국 소리.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뛰는 도중 절정을 지나 어느 순간 고통을 잊는 현상을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라고 하듯, 걷기 도중에도 이런 사소한 멋진 일들이 '워커스 하이 walker's high'를 선사한다. 혹은 'pilgrim's high'라고 해야 할까. 이 작고 놀라운 순간들에 모든 감각을 집중할 수 있고, 거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지금, 길 위에 있는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느낀다.(물론, 좀 벅찰 때는..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자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고통과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 나 자신이 스스로 찾은 행복의 방법들은, 그날의 걷기를 마치고 하루를 복기할 때 오로지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작은 선물을 찾을 수 있도록 예비한다. 혹은, 알 수 없는 어떤 미래에 다가올 힘겨운 날의 끝자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