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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ug 16. 2023

나의 첫 닉네임은 홍당무였다

나의 정체성을 찾아서

미디어의 발달로 세상이 커져갈수록 나를 찾는 것이 더욱 힘들다.  온라인의 바다에는 수많은 삶이 전시되고, 많은 정보들이 부유한다. 그것들은 다 좋아 보이고 더불어 나의 것은 더욱 보잘것없어 보인다. 인스타그램의 주인들은 화려한 사진과 영상으로 행복과 열정을 노래하고, 트위터의 각종 논쟁은 나를 시류에 떠다니는 뗏목의 유랑자로 만든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기저기 좋아요와 리트윗을 날리며 새 시대의 흐름에 부응한다. 그 외 각종 커뮤니티 속에서 넘쳐나는 좋은 글귀나 멋진 영상은 나의 삶이나 일의 방향을 자꾸만 바꾸어 놓는다. 그들을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내가 아닌 내가 거울 앞에 서 있곤 한다. 결국 나의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고 알록달록 앵무새 같은 누군가가 낯선 날갯짓을 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모방을 통한 창조인지, 어디부터가 흉내내기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들이 스펙트럼처럼 넓게 펴져 있는데, 온라인 속에는 오로지 계층화되고 정형화된 삶만이 분절되어 화려하고 과장되게 펼쳐져 있다. 진짜 삶은 그 속에 얼마나 들어있는 걸까?


sns 때문에 도둑맞은 것은 비단 집중력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보다 나 자신을 도둑맞은 것 같다.


그럼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과거에는 과연 있었던가?

내가 인터넷을 시작하고 닉네임을 정하라는 명령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들처럼 로즈라던가, 라벤더 따위의 멋진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데 그것은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결국 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홍당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나의 이미지로 스스로 인식해 왔던 그것, 그 촌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그것만큼 나를 대변하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본 나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면 홍당무였다. 채소들 사이에서도 딱히 환대받지 못하고 구색만 맞추어주는 존재인 홍당무. 나의 외모 또한 그에 한몫한다. 하얀 얼굴에 불룩한 볼살만이 불그레한 것이 영판 홍당무 같은 얼굴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까무잡잡하면서 탄력 있는 얼굴도 아니고, 노란끼가 돌면서 적당히 뽀얀 얼굴도 아니었다.  얼굴은 항상 열이 많아서 귀부터 볼까지 불그스레한 끼를 드러내고 전체적으로는 유난히 하얀 얼굴, 그래서 붉은 볼은 더욱 도드라졌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뭔가 건강하고 단단해 보였지만 나는 뭔가 힘이 없으면서 촌스러워 보였다. 거기다 이름의 끝자마저도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밝은 소리를 내는 '영'이나 부드러운 소리의 '희'가 아니라 뭉툭하게 끊어지는 소리인 '홍'이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고 인터넷이 익숙해진 나는 굳이 닉네임을 나와 일체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새로운 닉네임은 세한도가 되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표지에서 보았던 세한도 그림.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고 간략한 집 한 채와 소나무 네 그루를 그린 간결한 선들. 그 소박하면서도 고고하고 은은하고 잠잠한 것이 딱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 붉은 홍당무는 서늘한 세한도가 되었다.


요즘은 나의 무엇이 나인지 더욱 모르겠다. 특히 엄마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마구 흔들리는 요즘이다.  자유로운 양육을 표방하면서도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살피던 나의 모습이 다 거짓되고 부정되는 느낌이다. 새장을 벗어나고 싶은 절름발이 새처럼 아이는 자꾸만 새장 밖으로 날아가려다 벽에 부딪치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나는 아이를 다시 일으켜 새장으로 넣어야 할까, 그냥 두어야 할까, 하늘 높이 던져 올려야 할까. 그동안 나는 누구로 살아온 걸까?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어야 했을까, 그리고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한 번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하며 살지 못했다. 안정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만이 존재했다. 그런 강박이 나의 정체성을 막아온 시간들이었다. 만약 내가 이제 나를 찾게 된다면 나는 누구일까?


분명한 건,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텃밭에서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고 집에 돌아와 노곤한 가운데 책을 읽으며 잠들고 싶다.

밭에서 난 것들로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그 삶을 작은 이야기로 들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그것이 어릴 때 나의 정체성이었던 홍당무를 키우며 홍당무가 메인이 되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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