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투병과 함께 한 10년 동안 엄마에게 무심했던 동생을 원망한 적은 거의 없었다. 화나고 짜증 난 적은 부지기수였지만, 그건 원망의 차원이 아니었다. 엄마의 치매로 인한 과한 언행으로 동생이 지친 게 한 편 이해가 되기도 하고, 한 편 내가 더 노력하자는 마음이 드는 정도였달까. 엄마가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덤덤했던 동생의 모습에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엄마가 안 계시는 지금은 원망이라는 다른 감정의 흐름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다.
왜일까? 장례를 치르는 중에 끊임없이 내 가슴 위로 올라오는 원망으로 멀미를 참 듯 속을 다독여야 했다. 그 시작은 엄마의 위독 사실을 듣고 동생과 급하게 병원으로 차를 돌릴 때부터였다.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부부끼리 여행을 많이 다니며 잘 지내보자'는 동생의 말에 나는 참아왔던 10년간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내었다.
"엄마 건강하실 때는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내 말에 동생은 주섬주섬 이유를 붙였는데 그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 살을 붙일 마음이 안 나서 그냥 넘겨 들었다.
그런데, 장례식장 입구부터 끝이 보이지 않게 많은 화환들이 양쪽으로 꽃길을 이루고, 밀려들어오는 조문객 사이에서 동생이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며 나의 구토는 시작되었다. 어쩌면 엄마의 외로움은 동생의 사회적 성공과 연결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항상 동생을 찾던 엄마에게 동생은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바쁘다는 이유로.
오래전 남편이 '어머니 장례식장에 처남은 발을 들여놓게 하고 싶지 않다던' 말에 남편을 미워했었는데 왠지 오늘은 그 말을 듣지 않은 내가 미워졌다.
그 화려한 꽃길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꾸만 궁금해지면서, 나는 밀려오는 낯선 그들과 자꾸만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동생은 장례 마지막날 밤 내게 말했다.
장례식 비용과 장지 비용이 비슷하게 나올 거 같으니 반씩 부담하면 되겠다고.
모든 수발은 오롯이 내가 하면서, 모든 금액을 반반 부담해 온 동생에게 나는 두 번째로 속의 말을 겨우 내뱉었다.
"이번엔 네가 아들로서 조금 더 부담해도 괜찮아."
동생은 내 말에 답이 없었다. 남보기엔 성공한 삶으로 보이는 동생이 항상 엄마의 일에 대해서는 인색한 이유를 원래 사업하는 사람은 항상 돈이 부족하고, 누나와 매형이 나름 안정된 직업으로 소득이 적지 않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 여겨 이제껏 반반 부담에 토를 달지 않았던 나의 어리석음에 또 나는 내가 미워졌다.
엄마의 마지막 길을 동행한 후 동생은 짧게 말했다. '엄마 사진을 보관할 거면 누나가 가져가라"
잔치 같던 장례식은 그렇게 화려하게 여운 없이 끝났다. 아니, 아직 동생과의 비용정산이 남았기에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엄마 사진을 내 방 한편에 놔두고 오며 가며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는 나를 보며 엄마 사진을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상실감, 동생에 대한 원망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힘이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