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늦게 도서관에 도착한 나는 커다란 열람실 책상들 중에 다행히 비어있는 한 자리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공인중개사 수험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그 순간 선명한 빨간색 표지와 그 위에 굵은 고딕체로 쓰인 <공인중개사 합격예상문제>라는 커다란 글자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모을 것만 같아 얼른 책을 활짝 펼쳤다.
이렇게 시작한 공부는 10개월 만에 다행히 합격이라는 이름으로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겨울방학이 있던 1월과 여유가 다소 있던 2월을 합쳐 2개월, 여름방학부터 10월 말까지 3개월, 주말마다 띄엄띄엄 공부한 것을 끌어모아 1개월, 총 6개월 남짓한 공부 기간이었다.
나는 왜 이 공부를 시작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아는 지인이 언듯 보기에 쉽게 합격하는 것 같았고 나에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권했다. 하지만, 전~~ 혀 쉽지 않았다. (그 지인은 나를 미워했거나 과대 평가 한 것으로 보이는데 전자일 가능성을 높게 본다. ) 9~10월 두 달간 세 번 쳐 본 모의고사 점수는 합격점에 미달하게 나오고 급한 마음과 달리, 할 내용은 어찌나 많고 복잡한 지 왜 시작했을까를 매일 노래하는 시간들이었다. 시험 당일에도 합격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시간 초과로 여러 문제를 찍고 말았다. 가채점을 해보니 다행히 합격 점수는 넘기는 거 같아서 일단 합격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자본으로 조용히 노후 소일거리로 하기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이 생각도 공부하다 보니 너~~ 무 아니었다. 보기에는 별 거 아닌 일로 보였던 이 일이 많은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막중한 일이었다. 성격도 활달해야 하고, 주변 상황에 민감해야 하고 상대를 대응할 맷집도 있어야 하고 전문성도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사실 이것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실전은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이처럼 막상 공부를 시작해 보니, 내가 그전에 막연하게 생각하던 공인중개사라는 직업과 다른 현실로 느껴져 공부하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 내 길이 아닌 길로 들어서는 것만 같아 자꾸 뒤돌아보았지만, 중도 포기하기에는 억울했으므로 끝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도달한 공인중개사 합격의 소감은 이 공부를 시작한 첫날 도서관에서 나는 왜 당당하게 빨간책의 표지가 보이게 올려놓지 못했을까에 대한 생각으로 갈음한다. 도전하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던 이 일이 내가 막상 도전하려고 보니, 왠지 드러내기에 부끄러운 어떤 이미지인 직업인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경제나 부동산에는 너무나 무관심해서 부동산 관련 일은 남편이 전담했고, 내가 부동산 사무소에 가서 한 일은 최종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이 다였다. 그때 잠깐 일별 했던 부동산 사장님(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더 각인되는)의 이미지(세상 밝고 편해 보이는)가 내가 본 전부였다.
나도 모르게 든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한 편은 십여 년 전 부동산 광풍이 불 때 남편과 함께 갔던 부동산에서 정신 나갈 것처럼 겁을 주며 바람을 잡아서 큰 비용을 지불하고 (시세차익을 노리고) 아파트를 샀다가 손해 보고 팔았던 기억도 한몫한다. 그리고 각종 뉴스와 주변 소문을 통해 공인중개사가 투기 조장과 전세 사기의 공범으로 조명된다는 것도 그렇다.
교육문제, 병역문제와 함께 부동산 문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주요 담론이라면 공인중개사는 이익을 남기는 것만이 목적인 장사꾼이 아닌 전문가로서의 직업윤리가 필연적이었다. 과거, 교사가 교사의 직업윤리와 도덕성 면에서 부끄러웠던 시절의 업보로 지금의 교사들이 어느 정도 불신을 감수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공인중개사도 과거의 부정적 인식을 벗어나 새로운 직업윤리를 가짐으로 그 자부심을 키워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