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ENA VISTA SOCIAL CLUB>
내가 남들보다 좀 더 많은 경험을 한 게 있다면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영화 보기와 여행. 영화 연출을 전공했고 영화 감독의 길을 가려다 어쩌다보니 지금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애초에 끈기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 여러 취미를 거쳐 왔지만 단 한번도 손에서 놓은 적 없는게 영화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사실은 국민학교지만) 거의 매일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와 영화를 보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심할때는 하루에 두세개를 보는 일도 많았고 지금까지도 영화를 보는 일은 내 삶에 큰 부분이다. 물론 때에 따라 잠시 멀어질 때도 있고 요즘은 예전만큼 큰 열정으로 영화를 보지는 못한다. (너무 많이 본 내 탓도 있지만 요즘의 영화들은 예전보다 점점 더 획일화 되고 개성이나 철학이 옅어지는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꼰대적 시점이려나?)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가요?
그 질문이 내게는 제일 어렵다. 어린 시절 최초로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작품도 있고, 힘든 시기에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영화들도 있다. 너무 잘 만들어서 좋은 영화가 있고 만듬새는 엉성해도 감독의 진심이 넘쳐나서 좋아하는 영화도 있다. 재밌어서 좋아하고 슬퍼서 좋아한다. 처음 봤을땐 별로였는데 다시 보니 너무 좋아진 영화가 있고 너무 좋아하는데 보면 마음이 아파서 다시 보지 못하는 영화도 있다. 각자의 의미가 다를 뿐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너무나 많다.
어떻게 그 중에 하나만 꼽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수많은 영화들 중 좋아함과 동시에 그로 인해 여러 경험을 하게 해준 게 바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다. 마침 얼마전에 국내 OTT 서비스에 릴리즈가 되어서 오랜만에 다시 보고 글을 끄젹여본다.
유명한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배경으로 한때 인정 받았으나 시대의 변화 속에 음악과 멀어졌던 나이 든 뮤지션들이 등장한다. 빔 벤더스의 작품들에 계속 음악 감독으로 참여했던 라이 쿠더가 쿠바에서 그들을 모아 앨범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과정과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모아서 보여준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지만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쿠바라는 나라와 그들이 지나온 복잡했던 역사, 그리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예술과 문화가 영상 너머에 잔뜩 넘실거린다.
쿠바는 제국주의 시대에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수많은 흑인들이 강제 이주 되었다. 그로 인해 원주민과 흑인들 거기에 스페인의 문화가 뒤섞이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아프리카의 리듬에 스페인의 음율이 추가되고 엄혹한 현실을 넘어서는 낭만적인 노래가 더해졌다. 독립 이후 미국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며 화려한 관광지가 되고 그들의 취향에 맞춰 재즈와 빅밴드들이 번성하다가 그 후에 쿠바 혁명을 맞이한다. 우리가 모두 아는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이야기가 펼쳐진 시기이다. 체 게바라는 또다른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로 떠나 그곳에서 죽고 카스트로는 쿠바를 철저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면서 고립의 시대를 보내었다.
쿠바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 이미지가 1950년대의 올드카들인데 그게 바로 고립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후 세계 경제에서 떨어져나간 쿠바는 새 자동차를 수입하는 게 매우 힘들어진 까닭에 그 오래된 차들을 수리하고 또 수리하며 유지해 온 것이다.
(실제로 쿠바에 가면 그 차들을 탈 수 있는데 보통 터무니 없는 가격부터 시작하고 끝없는 흥정을 해야만 한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혁명 전 잘 나가던 그 시절 실재했던 장소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다 그 클럽에서 연주했던 건 아니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앨범과 영화의 제목으로 삼았다.
수장인 꼼빠이 세군도를 비롯해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 너무나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이브라힘 페레르와 오마라 포르투온도. 그들 대부분은 그 영광의 시절을 끝으로 뮤지션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루벤은 그 긴 세월 아예 피아노조차 없이 살았다. 이제 노쇠해진 그들을 모아 만든 영화와 앨범은 세계적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두번을 보았고 그 후에 DVD 를 사서 여러번을 더 보았다. 그리고 영화 속 노래들이 실린 앨범은 정말 수천번을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2년여간 여행을 하는 동안 안장 위에서, 아무도 없는 야산이나 들판에서 텐트를 치고 잠들때 늘 내 옆에 그 음악들이 있었다. 어릴때 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이 영화 속 Ruben Gonzalez 는 연주와 그의 인생 모두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긴 세월 그는 피아노도 없이 살았고 이제는 관절염으로 걷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자유롭고 아름답다. 나의 피아노 연주는 여전히 형편없지만 그의 모습을 보며 나이 들어 걷기 힘든 그날까지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여행을 끝내고 제주도에 살면서 한때 아마추어 재즈 밴드에서 피아노를 맡기도 했었다.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연주하던 루벤의 모습에 짝퉁 한국판 루벤인 내 모습을 겹쳐 상상하며 합주도 하고 무대도 올랐다. 물론 연주는 엉망이었지만 여전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누군가에게 떠벌리기엔 부끄럽지만 혼자서 모든 걸 작업해서 발매한 디지털 앨범에서 그의 이름을 따 와서 가명을 삼기도 했다.
RUBEN. D
D는 여기 글을 쓰는 이름 두둥실에서 따온 것이다. 남미를 여행중일 땐 한글 이름 발음을 사람들이 힘들어 했기 때문에 가명으로 아예 Ruben을 내 이름으로 쓰기도 했다. (원래 이름엔 H가 두개 들어가는데 스페인어에서 H는 묵음이다.)
남미 대륙 남쪽 끝의 파타고니아에서 출발해 페달을 밟아 북으로 올라가서 멕시코까지 갔다. 거기서 나는 매우 번거로운 루트를 선택해서 쿠바의 수도 아바나 (HAVANA)로 갔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때문이었다. 자전거를 들고 비행기를 타려면 박스를 구해서 자전거를 분해해 포장하고 추가 요금을 내는 매우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야만 했다. 영화속 말레꼰을 내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 곳에서 CHAN CHAN을 듣고 싶었다.
그렇게 간 아바나는 나의 기대에 부응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세상 모든것이 그렇듯.
인터넷이 거의 되지 않았다.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곳이 시내의 호텔 하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머무는 한달동안 아예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엔 매우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익숙해지면서 알 수 없는 평화로 변했다.
외국인과 자국인들이 사용하는 돈이 달랐고 물가도 당연히 큰 차이가 났다. 조금만 방심하면 자잘한 사기를 당하기도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바나의 명물 말레꼰에 앉아 노을을 보며 부에나 비스타의 음악을 듣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 영화를 보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길거리 곳곳에서 기타 하나 들고 CHAN CHAN 을 부르고 돈을 달라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지만)
아바나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밤 재즈 클럽에 갔다. 거기서는 영화 속 나이든 뮤지션들과는 또다른 젊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라인업이 다양했고 연주 수준도 매우 높았다. 전형적인 스탠다드 연주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자신들의 색깔이 매우 강했고 그 중 어느 트럼펫 쿼텟의 쿠반 아프로 느낌으로 연주한 All the things you are는 너무 색다르고 멋있었다. (한국에 와서 기억나는대로 카피해보려 했으나 좌절만 느꼈달까.)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택시를 대절해 동쪽의 트리니다드와 주변을 구경하고 서쪽은 비냘레스를 지나 시골마을들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혼자 다녔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쿠바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고 그래서 아바나나 트리니다드 같은 곳에서는 관광객을 상대로 어이없는 사기를 치기도 하고 득달같이 달려와 홍보 아닌 홍보로 괴롭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이듯 시골에 가면 도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미소와 친절함을 매순간 마주하게 된다.
지금도 내 핸드폰 속 ‘좋아하는 음악’ 리스트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노래들이 들어있다. CHAN CHAN 은 운전하거나 차에 타고 달릴때 큰 소리로 들으면 여전히 속을 뻥 뚫리게 만들어준다. 창문을 열고 약간의 바람소리가 음악에 더해지면 마법처럼 아바나의 말레꼰이나 비냘레스의 정글로 나를 데려간다. 특히 간주 부분의 트럼펫 소리가 나올땐 너무 벅차서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난다.
Veinte Anos가 흘러 나오면 지금은 소식도 모르는 아주 오래전 연인과의 추억을 곱씹기도 하고 El carretero는 자전거 여행을 할때 보고 느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영화속 몽타주처럼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든다. 루벤 곤잘레스의 연주곡이자 앨범과 같은 제목인 Buena Vista Social Club 은 내가 그의 연주를 사랑하는 이유 그 자체이다.
내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예술적인거나 철학적이거나 자기만의 미덕이 있다면 나는 그 작품을 지지하고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인식’을 떠나 본능적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영화들이 있다. ‘내 마음에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영화를 보는 중이거나 보고 나서 가끔 마음 속에 바람이 불 때가 있다. 어느 맑은 가을 저녁 살랑살랑 불어와서 내 옷깃과 머리카락을 스쳐가는 기분 좋은 바람. 어쩐지 내 몸이 떠오르는 것 같고 웃음이 나거나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어떤 심상. 가만히 있는데도 몸 구석구석이 나도 모르게 들썩이는 것 같은 기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이 바로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영화속 뮤지션들은 인생의 황혼기에 세계 투어를 다니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번 공연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연이 닿지 않은 나는 가보지는 못했다.
이제 영화 속 뮤지션들은 대부분 이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삶의 일부분만을 떼어서 보여준다. 영화 속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이 어떤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화면에 보이는 그들의 웃음, 기쁨들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순간이다. 긴 세월 녹녹치 않았을 현실 속에서도 그들은 행복의 순간이 왔을때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걸 느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행복의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을 알아채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러기 위해서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언제나 이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허무하다고 믿는 나조차도 그들을 보면서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