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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에 Dec 29. 2019

익명성과 진솔함에 대하여

양날의 검 같은 익명성

최근 시간이 조금 생기고, 이리저리 생각할 것이 많아지면서 내가 관리하고 있는 채널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두 비공개 글로 돌려놓았지만 한 때 열심히 해서 이런저런 서포터즈 활동을 했던 블로그도 구경했고 글이 몇 개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충실히 쓴 것 같은 브런치의 글들도 돌아보았다.

과거의 글-특히 블로그-을 보면서 과거의 내가 귀엽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봐도 꽤 그럴싸한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을 되짚다 보니 이런 플랫폼들을 잘 활용하면 퍼스널 브랜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꽤나 늘어나버린 플랫폼을 어떻게 잘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브런치라는 플랫폼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덜컥 신입 스타트업 디자이너에서 2년 차 팀장까지 되어버린 사연으로 글을 쓰고 싶어요 하고 작가 신청을 했었고, 정말 감사하게도 덜컥 작가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그래서 초반에 계획했던 회사와 디자이너에 관련된 글을 쓰는 것에 충실했다. 실제 인물이라는 현실감을 주기 위해서 실제 사진을 프로필로 썼고, 하나 둘 늘어가는 라이킷과 구독자분들이 새삼 신기했다. (이 글을 빌어 짤막한 한 문장이지만 글을 읽어주시고 리액션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브런치에 쓰는 글들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걸 느꼈다. 좀 더 솔직하고 가감 없이 쓰고 싶은데, 그럴 때마다 프로필에 걸어둔 내 사진과 글 속에서 나를 유추할 수 있는 힌트들이 발목을 잡았다.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괜스레 불안한 마음. 언제든 내가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 마치 협박처럼 느껴졌다. 내 감정에 대한 협박.


그렇다 보니 내 감정들은 가지치기당했다. 훨씬 힘들었지만 힘들다고 모두 털어놓을 수 없었고 적당히 에둘러 표현하고 문장을 줄였다. 어느 순간 그저 단정하게 비슷비슷한 글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


개인적으로 글이란 것은 표현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고민하고 단어를 고를 수 있고, 쓰인 글 안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다. 순간에 휘발되는 말과 다르게 내게 글은 그런 존재였다. 말로는 못다 한 감정을 꾹꾹 눌러 한 자 한 자에 담아내고 속상하고 힘겨운 일들을 그 활자 안에 넣고 내 마음에선 조금 덜어내는 것. 마치 힘든 날에 더욱 일기를 쓰고 싶던 사춘기 시절의 어린 때처럼.


이건 내가 말로 표현하는 것에 서투른 사람이라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같은 행위라도 사람마다 의미와 해석이 다른 것처럼, 놀라거나 화나거나 기쁠 때 조차도 그걸 말로 다 쏟아낼 수 없는 사람이라서. 한번 더 돌이켜보고 굳이 그 단어들을 골라 적는 일들이 또 다른 감정의 표출이 되는 것. 내겐 글쓰기가 그러했다.


그래서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기로 했다.


가장 나답고 가장 솔직할 수 있기 위해서.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 그 앞에 가면을 하나 두어서 오로지 그 글에 집중하고 그 속에 담긴 것을 느꼈으면 해서. 그리고 더욱 솔직하고 진심인 내 감정을 글 안에 담고 싶어서.


어느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비겁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조차 나임을 나는 인정하고 싶다. 그리고 설령 익명이라 하더라도 이는 그 어떤 순간의 현실에 살아가는 나보다 가장 더 나다운 것임을 말하고 싶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머무르는 곳. 그게 정말 내 마음 깊은 곳의 감정들이고, 결국 나를 이루는 것들이 아니던가.


온라인 상에서 익명성은 주로 나쁘게 쓰여왔던 것 같다. 연예인들을 향한 악플이 그렇고, 게임 속에서 욕을 하고 부모님 안부를 묻는 채팅이 그렇다. 타인을 향하기 위한 익명성은 그렇게 날카롭다. 내게 향하지 않을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의 익명성이다. 타인을 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에 좀 더 가깝다. 글에 나를 좀 더 투영하기 위해 현실의 나와 분리하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아마 앞으로 브런치에는 에세이 형식의 글들이 더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심사를 받았을 때처럼 신입 디자이너와 꼬꼬마 팀장이라는 포지션은 여전히 유지되겠지만, 그 안에서 실질적인 정보보다는 내가 겪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솔직하게 담아내려 한다. (고민을 하면서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정보를 주기에는 아직 내가 너무 초보 디자이너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있다.)


힘들었던 순간 가까운 사람이 해준 위로가 있다.


"너부터 챙겨야 다른 사람도 챙겨줄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너부터 챙겨."


아무도 온전히 내 편이 되어줄 수 없는 이 험한 세상에서, 나부터 챙기기 위해 나를 위한 글쓰기를 해보려 한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쓰기는 그 이후에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혹시 모른다. 나를 위한 글쓰기를 운이 좋게 타인이 좋아하게 될지도! 물론 그저 꿈같은 이야기고, 치기 어린 욕심이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고 운이 닿는다면 그런 날이 오면 참 좋겠다. 왜냐면 나는 꿈도 많고 욕심도 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더라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내 마음을 진솔하게 터놓을 공간이 있다는 위안이 그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더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브런치에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저물어가는 2019년의 끝자락에서,

가면을 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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