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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에 Dec 05. 2019

입사 8개월짜리 꼬꼬마 팀장

체계가 바뀔 때 다시 정비해야 하는 것들


"OO님이 디자인 이사를 맡게 되어서, 이제부터 미카님이 디자인 팀장입니다."


내 생애 첫 승진은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단 여러모로 정말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공석인 자리를 채워야지'와 '필요하니 뜻이 있어 맡겼겠지?'라는 어림짐작으로 팀장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금 미래인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그때 '아, 저 팀장 할 경험과 능력이 안돼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019년 말인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는 생각이다. 지금에서라도 매니징에서 더 훌륭한 디자이너가 오게 된다면 팀장직을 드려야지 하는 생각.


당시 좋은 직원분들은 퍽 당황스러운 승진 소식에 축하 인사를 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초반의 나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지만, 오 미카 팀장님~ 하면서 장난스럽게 놀렸던 분들도 계셨다.


어떠한 역할이 주어진다는 건 분명 상대가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좋은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책임감이란 단어는 어린 시절부터 내게 가볍지 않은 무게의 단어였고 그래서 나는 때때로 꼬꼬마 팀장이라서 더 괴로웠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제 막 사회에 뛰어들어서 맨땅에 머리를 박아가며 배워가고 있는데 그것과 동시에 팀장이라는 짐가방이 하나 더 툭 얹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 첫 승진은 인정받았다는 순수한 기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초기에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디자인팀 인원은 여전히 3명이었고 그중 한 명이 이사, 한 명이 팀장, 한 명이 팀원이라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구조가 낯설긴 했지만 과거의 우리는 여전히 한 명(이사)이 업무를 나누고 나와 다른 디자이너가 일을 하는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회사 전체에 깔려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서로의 소통에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다툼이 잦아졌다. 주로 나(팀장)와 이사와의 다툼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감을 가짐과 동시에 내가 주장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고 생각했고, 상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크게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이전 같았으면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을 부분도 몇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그것보다는 다른 방향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그리고 때때로 상대는 그것을 본인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나와 상대 모두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자유로운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이어져오고 있고, 일하는 방식 자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데 어째서 이렇게 자꾸 그리고 더욱더 빈번하게 충돌이 발생하는지. 이어지는 다소 거친 논의와 충돌은 서로를 일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둘 다 지쳐서 너덜거릴 때 즈음, 몇 번 더 충돌하고 나서야 서로가 생각하는 각자의 역할과 책임의 영역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는 이사라는 직함을 달게 되긴 했지만, 그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사회경험이 많지 않은 나와 비슷한 또래였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꽤나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몇 차례 하고 서로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내 역할은 이거, 네 역할은 이거. 애매하거나 한쪽에서 결정 내릴 수 없는 것들은 함께 하는 일의 목록이 되었다. 그리고 정리한 것들을 깔끔한 문서 형태로 남기고 '디자인팀 업무체계' 페이지를 만들어 올려두고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 안타깝게도 지금 그 페이지가 변형 및 업데이트되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까지 역할을 나누었는지는 명확히 적을 수가 없다.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걸 부정하고 싶진 않다. 실제로 그 문서를 작성하고 난 뒤에 한 명이던 팀원의 혼란도 많이 줄었고, 나와 이사와의 다툼도 훨씬 줄어들었다. 선을 잘 그어둔 덕에 서로의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고 애매한 것들은 그때그때 또 논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전문적인 용어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부딪혀가며 배웠던 것들이 워크플로우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신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고 (그래서 더 험난히 만들어지긴 했지만) 워크플로우를 만들자 꽤나 많은 것들이 명확해졌다. 컨펌을 받을 사람이 명확해지고, 사안에 대해 논의할 상대가 누군지 분명해졌다. 자연스럽게 역할이 규정되지 않아 생겼던 다툼은 줄어들었고, 나름의 평화를 되찾았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나는 팀장으로 남아있지만 복학을 이유로 이사직을 맡았던 사람은 학교로 돌아갔고, 디자인 이사직은 사라졌다. 다른 디자이너 역시 학교로 돌아갔고, 지금은 새로운 디자이너 두 분과 함께 일하고 있다. 팀의 구성과 체계가 바뀌었고 큰 메인 프로젝트와 대부분의 일들은 나를 거쳐서 3명이서 나누어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작은 일들이나 단발성의 프로젝트일 경우 디자이너 개인에게 직접 가서 업무 요청을 하는 경우들이 생겨났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하나 발생했는데, 내가 묻기 전까지는 두 분이 지금 어떤 일을 하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두 분이 무얼 하고 있고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 일인지 파악해야 다른 일을 드릴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번번이 '지금 어떤 일 하고 계세요? 언제쯤 끝날 것 같으세요?'하고 물어봐야 했다. 이건 내 기준에서 상당히 시간과 노력이 아까운 일이었고 나는 다시 디자인팀 워크플로우를 세워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문제와 해결에 대한 생각은 명확했다. 

1. 현재 각자 무얼 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2. 디자이너분 각각에게 가는 업무를 모두 나를 통해 가라고 강제해도 효과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3. 외부에서 들어오는 요청을 막을 수 없다면, 디자인팀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인쇄해서 붙인 간략 워크플로우 안내지. 자세한 워크플로우는 각 단계별로 최대한 구체적으로 써서 디자인팀 페이지에 정리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적극적인 지라 이슈의 사용'이었다. 내가 담당자로 배정하는 일이든, 외부에서 직접적으로 받은 일이든 실제 업무 담당자는 이슈를 반드시 만들어서 진행 중 보드로 옮겨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워크플로우 내용을 내가 만들고 문장으로 써서, 아예 디자인팀 워크플로우로 인쇄해서 붙여주세요! 를 업무로 요청했다. 워크플로우 안내지를 인쇄해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두 분은 해당 내용에 따라 이슈를 열심히 사용해주셨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일들을 이슈에 작성해 보드에 올려두었다.


적극적인 이슈 사용으로 서로 일에 대한 공유도 보다 쉬워졌고, 무엇보다도 내 입장에서는 보드만 보면 어떤 분이 어떤 일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어 업무분장도 원활해졌다. 물론 외부에서 오는 모든 일들이 나를 거쳐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팀장이 있는 조직의 일이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최고보단 최선을 선택해야 했고 효과는 꽤나 만족스럽다.





말도 안 되는 연차에 팀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보면 끊임없이 '잘 나아가고 있나?'를 고민하게 된다. 지금 내가 누굴 매니징 할 때가 아니라 나 스스로 디자인 능력을 쌓아야 할 때 같은데, 팀장이 되고 나니 아무래도 실제 디자인을 하는 기회를 다른 분께 드려야 하니 그런 부분도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새롭게 글을 쓸 계획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어느덧 이 회사에서 디자이너보다 디자인 팀장으로 있었던 시간이 길어지고 있고, 이 회사에서 주어진 나의 역할이니 이리저리 애쓰며 그 역할을 충실히 행하는 게 전부라 생각한다. 처음 이야기했던 그 책임감은 여전히 바닥나지 않고 내가 성실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처음도 지금도 막막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나쁜 결과가 되지 않기를 애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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