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글감 '일감' 프로젝트 1
꼬소하면서도 비릿한 콩 삶는 냄새. 압력밥솥에서는 서리태가 열기를 가득 머금어 부풀고 있다. 수분을 머금다 못해 톡 터진 한쪽 옆구리에선 연둣빛 속살이 비친다. 치지직 치직, 압력밥솥 내부에서 나는 소리가 몇 차례 반복되더니 거대한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고소한 향의 증기는 천장에 닿아 벽을 타고 내려온다. 이내 사라진다. 이 스팀에 얼굴을 맡겨 스팀 마사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든다. 왠지 단백질 가득한 검은콩 훈기라면 피부에도 좋을 것 같다. 직접 심고 얻어낸 콩의 훈기라는 생각이 들자, 그 소중함이 한층 더 마음에 와닿는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지친 몸을 식탁 앞에 앉혀 아무 생각 없이 콩을 고른다. 하루에 딱 냉면 한 그릇, 소쿠리 가득한 콩 더미에서 하루치 콩을 담아 온다. 밥을 한 숟갈 입에 넣어 우물거리며 콩을 한 줌 움켜쥔다. 노란빛 메주콩, 검은색 서리태, 서리태 속살보단 살짝 칙칙한 연둣빛 선비잡이콩과 푸르대콩, 그리고 오리알태콩. 오늘 고른 콩은 하룻밤 불려놨다가 검은콩두유를 만들어 먹어야겠다,라고 다짐하며 콩을 분류한다. 벌레 먹어 헤벌레 해진 콩은 아깝지만 골라내고, 누런 콩은 이 그릇에, 연둣빛 콩은 저 그릇에 담아둔다. 마구잡이로 섞여 있던 콩은 마침내 제 자리를 찾는다. 색깔별로 정돈된 콩들을 보고 있자니, 아름다운 콩의 자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콩이 빠지지 않는 밥상을 겨우내 갖게 될 것이다. 어제 처음 고른 콩은 콩자반으로 재탄생해 저녁 식탁에 올랐다. 출근할 때 물에 담가 불려놓고, 퇴근 후 달콤 짭조름한 콩자반을 만들었다. 밥반찬 뚝딱. 반찬통에 콩자반을 덜어내고, 냄비 바닥에 늘러붙은 양념에 밥 한 그릇과 몇 알의 콩을 넣고 야무지게 비볐다. 방금 구운 생김에 한입 싸 먹어보니, 이럴 수가, 너무 맛있다. 쫄아든 양념이 달콤하니 내가 딱 좋아하는 단맛이었다. 어릴 땐, 콩이 이렇게 달콤하다는 걸 미처 몰랐다. 농사짓기 전엔 콩 맛을 음미해 볼 생각을 못 했다. 콩 농사를 지어보니 내가 키운 콩이 너무 소중하고 맛있게 느껴진다. 밥에 넣어 막 쪄서 먹는 콩도, 자반으로 만든 콩도 다 맛있다. 내일 만들 두유도 기대가 된다.
콩 덕분에 나는 농사에서 재밌는 점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콩 털기다. 콩대를 끊어다가 갑바에 쌓아두고 도리깨로 사정없이 두드리는 이 과정. 여러 색의 콩이 이리저리로 튀어 오르며, 날아다닌다. 찰랑찰랑 창창, 콩대를 두드릴 때마다 숨어 있던 콩알들이 총총 튀어 오른다. 꼼꼼히 두드려 남김없이 거둔다. 콩 치기가 끝나고, 검불을 제거해야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가 기회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쿠리에 쌓인 콩을 후루룩 바닥으로 조금씩 쏟아내면, 가벼운 검불과 꼬투리, 먼지는 저 멀리 날아간다. 묵직한 콩들이 후두둑 우수수 떨어질 때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보람차다. 이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고 빗자루로 쓸어 담으면 작업 끝. 겨우내 콩 고르며 심심할 틈 없이 지내겠다.
2025년 1월 4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