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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비스트 Jul 25. 2020

누드족을 위한 변명

뉴브런스윅 해변에서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서부에서 동부에 걸쳐 캐나다의 여러 곳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

그중 뉴브런스윅의 인구 오천명 정도의 작은 대학도시에도 1년 정도를 살았었다.


학교 근처의 자그마한 아파트에 거주했었는데, 옆집에는 늙은 노부부와 어린 손주가 함께 살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인 나와 남편에게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신 분들이었다. 귀여운 그 손주는 내게 크레파스로 그림도 그려주었고, 여름에는 마당에서 같이 물놀이도 했었다.  


주말에는 가끔 그 가족과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소일 삼아 바다에 나가 물고기나 랍스터를 잡아오기도 하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엔 고래를 구해준 이야기를 꺼냈다. 고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가 보니, 해변가 바위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한 고래를 발견할 수 있었단다. 밀물에 들어왔다가 갇힌 듯했는데, 그 고래가 아프다고 좀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지체 없이 가슴높이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들어가 고래를 밀어내어 구출해 준 이야기를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자유로움을 얻은 고래는 바다로 나가기 전, 할아버지를 돌아보고 눈을 맞추었다고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미소와 함께 반짝거렸다. 고래를 구출해 주다니, 얼마나 매혹적인 이야기인가? 인간에게 감사의 눈인사를 하는 고래이야기는 또 얼마나 따스한가? 나도 왠지 그 장소에 가서 고래의 흔적이라도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할아버지가 말한 그 장소를 기억하며 나는 남편과 함께 해변가를 향해 한 시간여 정도를 걸어갔다. 낮고 완만한 산등성이와 늪지대를 지나자 눈 앞에 넓게 펼쳐진 해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고 고즈넉했다. 밴쿠버와 핼리팩스, 뉴펀들랜드의 해변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시원하지만 말랑말랑 따스한 공기가 싱싱한 풀냄새와 섞여 폐 속에 한 가득 느껴졌다. 바닷 공기가 너무나 상쾌하고 황홀했다. 마치 태초가 시작된 장소에 내가 서 있는 듯 오묘한 평화로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며 위로해주는 듯했다.


별안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그 상태를 온몸으로 껴안고 느끼고 싶어 졌다. 나도 모르게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가슴 밑으로 곧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스쳤다. 머리가 가벼워지고, 몸도 가벼워 마치 공기의 일부가 되어 부유하는 느낌... 마치 샤갈의 그림 속 인물처럼 행복한 파스텔 빛깔의 공기 속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평화와 만족감이 밀려왔다.    


(출처 - https://www.wikiart.org/en/marc-chagall/over-the-town-1918)

(출처: https://www.wikiart.org/en/marc-chagall/the-promenade-1918)

[위 그림 속 배경이 바다이고, 두 남녀가 맨몸으로 날아다닌다면 정말 완벽하겠다!]



이런 내 행동을 본 남편은 잠시 놀란 듯했고, 혹 주변에 사람이라도 있는지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크게 안도한 그는 팝콘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외쳤다. "자기도 벗어봐. 바람이 미칠 듯이 부드럽고, 가벼워. 아.. 정말 좋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야!"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바람과 함께 맨몸으로 해안가를 뛰기 시작했다. 그도 곧 양팔을 벌리고 날개를 단 듯한 포즈로 내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어린아이가 되어 숨이 가쁘도록 뛰고 나니, 행복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린 둘 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 어딘가 고래가 잠시 머물렀을 법한 바위를 응시했다. 나란히 손을 잡고 서서, 천천히 바다와 하늘과 바람을 느껴보았다. 몸과 마음이 깨끗이 정화된 것 같았다.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것이 그런 것이었을까?  맨몸으로 바다와 하늘과 바람을 맘껏 느껴본 본 첫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추후 밴쿠버의 누드비치를 별 망설임 없이 가게 된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 누드비치에서 맨몸을 한 다양한 인종적 배경의 사람들은 모래사장에 앉거나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파도치는 차가운 바닷속에서 장난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 무리에 섞여 나는 또 한 번 누드가 주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신체의 모양과 크기, 색깔을 가졌지만, 애써 분별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나아가 평등한 동류의식 같은 것들을 느꼈다면 다소 과장된 표현일까? 인간에게 옷이란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보호 기능이 있겠지만, 옷을 통해 사회적 상징 - 지위, 젠더, 계급 등의 표식 - 이 주는 일종의 사회적 압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모든 사람들이 맨몸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 인간은 맨몸의 모양, 크기, 색을 다양하다고 인정하기보다 또 다른 위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맨몸으로 자연 속을 활보하며 자유로움과 행복, 자연에 대한 감사함을 순수히 느껴볼 수 있었던 그 경험만큼은 꼭 기억해 두고 싶다. 또한, 적어도 자연과의 조우에서 오는 만족감과 자유, 행복을 통해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나다운 나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본질적인” 자아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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