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키비스트 Aug 13. 2020

타자화된 이민자의 삶이란...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이 불러일으킨 아시아인 혐오의 역사

한국을 떠나기 전, 나는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정체화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권을 들고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나의 수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인 "한국인"임을 쭈욱 기억하고 살아왔다.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캐나다 땅에 발을 디디면, 저절로 영어를 하게 되고 캐나다 친구들을 쉽게 만들 수 있으리라 착각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캐나다인들 보다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다른 아시아인들과 더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또다시 "아시아인"으로 정체화 되었다.


취업신청 시, 소수민(visible minority) 란에 표식을 해야 했다. "여성"란에도, "이민자"란에도 표식을 했다.


나는 캐나다에서 "아시아인"이며 "한국인"이며 "소수민"이고 "이민자"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나 스스로를 그렇게 범주화할 필요가 없었다.


어찌 되었던, 이곳에서는 "인종화되고 젠더화된 소수민 이민여성"으로서, 종종 다른 아시안인들과 함께 간편하게 분류되었다. 어디서 왔냐(where are you from?)는 물음과 함께 북한인지 남한인지 확인하는 질문을 받고 살아왔다. 그 카테고리와 질문들은 당연히 중립적이지 않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부여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를 묘사하기 위해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이 표현들이, "국경"이라는 바운더리를 넘으면서 나의 정체성 구성에 새로이 얹어졌다.  물론, 정체성을 규정짓는 이 카테고리들은 너무나 헐겁고 느슨하다. 하나의 범주라 할지라도 그 안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경험과 이야기들이 획일화되고 단순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층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정체성이란 유동적이며 상황과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구성된다는 것을 매끄럽게 강조하려는 데에 있지 않다. 그 과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새로이 부여된 정체성은 내가 동등한 일원이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종종 혼란스럽고, 불쾌하고, 우울하고, 괴로웠다. 화도 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도대체 아시아 여성이라는 의미가 이 사회에서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왜 백인 여성보다 열등하게 취급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아보고 싶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들여다보면, 상처가 치유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첫걸음으로, 나와 느슨하게 그룹화되는 또 다른 아시아인들, 먼저 이 땅에 이민 온 중국인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아시아 이민여성으로서 내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아시아인에 대한, 아시아 여성에 대한, 그리고 이민자에 대한 차별의 역사성을 기억하면서, 인종차별에 대한 맥락을 차근히 짚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캐나다 역사 속에 기록되어 왔는가?


캐나다에서 중.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이제는 누구나 19세기 철도 노동자로 이 땅에 발을 딛게 된 중국인들의 이민역사를 배우게 된다. 당시 식민지배자들은 서부로 세를 확장해 나가며 철도가 필요해지자, 쉽게 부릴 수 있는 노동력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정착하는 것을 꺼렸기에, 인두세 (head tax)를 부과하였고, 여성 배우자를 데려올 수 없게끔 법으로 금지하였다. 백인 여성과 중국 남성의 결혼에 대한 사회적 저항감 역시 거세어서, 짝 없는 총각들만 넘쳐나던 중국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캐나다가 중국인들에게 거두어들인 인두세는 1988년 기준으로 약 1.5조 달러나 된다. 1885년 10불에서, 1896년에 50불, 1901년에는 100불, 그리고 1903년에는 500불까지 가파르게 치솟는다. 500불은 당시 2년 치 임금에 해당했다.  

 

(왼쪽: UBC대학 아카이브에 저장된 인두세 증명서 /  오른쪽: 나중에는 자녀들을 포함, 배우자도 인두세를 내야 했다)

위험한 노동을 감내할 노동자가 필요했지만, 정착을 통해 그 수가 늘어나 혹 영국계 백인사회를 위협할까 내심 두려워한 그 공포를 소위 황화론 (Yellow Peril)이라 한다. 캐나다 사회의 동양인에 대한공포, 혐오 및 이중성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사회적 담론을 들여다보면 더 생생히 알 수 있다.

 

(피임 열성론자들로 인한 진짜 문제/"외로운 백인" 위험 -출처: The Anti-Asiatic Weekly, 1921년 12월 1일; )

위 삽화에서, 왼쪽 코너에 신사모를 쓴 백인 남성이 출생신고를 위해 길게 줄을 선 중국인들을 보며 위험성을 느끼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20세기 초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은 비과학적인 이야기들을 생산해내어 인종차별의 근거를 제공했는데, 이 삽화를 보면 그 내용 중 한 부분을 알 수 있다. 바로 아시아인들은 우생학적으로 백인보다 열등하고, 이 열등한 종자들이 아이들을 더 많이 낳아 우월한 인자를 가진 백인들의 존재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미개한" 피식민지인들의 땅을 차지한 "문명화되고 발전된" 백인들의 적자생존론이 각광받아 식민지화를 합리화하고 제국을 팽창해 나가고 있었던 때이니, 적자인 영국계 캐나다인들이 아시아에서 온 미개한 중국인들이 씨를 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식민주의자들이 부를 쌓으며 만들어낸 불평등을 합리화하기 위해, 중국인들을 타자화하고 열등성을 만들어 낸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동시에, 저 삽화는 피임을 지지하던 20세기 초반의 백인 여성주의자들을 비꼬고 있다. 열등한 중국인들이 저리 아이들을 많이 낳고 있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피임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훈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밀리에 노름을 하는 중국인들," 벤쿠버 선, 1924년 5월 3일자)

이 그림은 중국인들이 밤마다 삼삼오오 모여 노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중국인들이 즐겨하는 마작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언급했다시피, 우생학은 "우월한" 인종인 백인과 "열등한" 비백인간의 혼인 행위와 "혼혈아"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홀로 노동자로 이주한 중국 남성들이 백인 여성들과 데이트조차 할 수 없었던 분위기에서, 힘든 노동 후 그들끼리 모여 마작을 한 것을 두고 부도덕하며 게으르고 열등하다고 비난하는 삽화이다. 이렇듯 특정 인종과 문화에 대한 태생적 열등성을 주장하기 위해 비과학적 논리로 무장한 우생학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아래 삽화는 백인들이 아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사회적 공황상태를 좀 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오리엔탈의 침략이 멈추지 않으면 이런 일이 생길지도," 벤쿠버 데일리 프로빈스, 1908년 3월 6일자)

무대 위에는 늙은 영국 신사가 마치 노예처럼 전시되어 있고, 무대 밑에 구경을 하고 있는 청중들은 터번을 쓴 시크교도들 및 청나라 복장을 한 중국인들이다. 무대 바로 앞에는 백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는데, 당시 동등한 백인으로 취급되지 않았던 동유럽인 혹은 남유럽 출신자로 추정된다.  


비참해 보이는 영국 신사는 대영제국의 "브리탸니아"를 절박하게 부르고, 오른쪽 하단의 욕심 가득해 보이는 중국인은 엉망진창인 영어로 "20년 전엔가는 백인들 진짜 많이 봤었는데"라며 히죽거린다. 마치 노예 거래상 같은 무대 위의 또 다른 동양인은 "B.C 주의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백인인데, 내륙지역에서 정말 힘들게 잡아왔습니다. 이제 웃기는 노래를 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라고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삽화는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1) 우선, 당시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비백인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가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으로 무장하긴 했지만, 얼마나 비참하고 모욕적인 행위를 다른 이들에게 저지르고 있는지를 말이다. 원주민 인구수를 질병으로 줄게 만들고, 살기 어려운 내륙으로 밀어붙이고, 이유를 붙여 체포, 구금하거나 박물관의 오브제로 만들어 버리는 그러한 행위들 말이다. 그들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던 일종의 죄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우월성은 열등한 위치로 낙하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겠다.


 2) 노신사는 비백인들 앞에서 대영제국의 노래를 처연히 부르고 있다. 제국이란 태생적으로 다문화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하다. 제국은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으로 구성될 수 없다. 제국이 문화와 인종이 다른 지역으로 팽창해 나가면서, 그 지역의 사람들을 전멸시킬 수도 없고, 완벽히 동화시켜 흔적을 지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국임을 증명하기 위해 인종적 타자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생성된 혼종성은 용인하고, 다문화로 포장시킬 수밖에 없다. 성공적인 제국 건설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인종적 타자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도 없는 제국의 지독한 모순이 저 삽화에 담겨있다.


 3) 영국계 캐나다인들의 위기의식 속에는, 저런 봉변을 당하기 전 제국의 일원인 시크교 인도인들, 중국인들 등을 억압하고 인구증가를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이 삽화가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저 삽화가 그려진 시절에는 숫적으로 백인들이 B.C 주의 소수였는데, 어떻게 저런 생각을 당당히 할 수 있었는지 뻔뻔스럽다. 그들의 무의식을 차지한 듯한 타자에 대한 위기의식은 몇 대를 지난 현재에도 특정 사건을 매개로 등장하곤 한다. 혹은 원주민들에 대한 행태에서 보듯이 사안에 따라 끈질기게 지속적이기도 하다.


한국은 겨우 35년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식민 경험이 남긴 결과물은 아직도 분단된 한반도에 강력하게 남아있다.


한마디로 식민 경험은 쉽게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35년을 훌쩍 넘어서는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배가 지구 곳곳에 뿌려놓은 그 트라우마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캐나다도 영국-프랑스의 식민쟁탈 경쟁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나라 중 하나이다. 원주민들을 내부 식민지화하고, (노령화와 인구감소로 선택한) 이민제도로 비백인 혹은 과거 피식민 국가의 후손들과 동거하고 있는 곳에서 그 트라우마가 쉽게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오늘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 세계를 풍미했던 우생학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생학에서 파생되어 나온 I.Q 테스트를 하거나 혈액형으로 성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국가를 막론하고 피부색으로 차별을 하거나, 난민, 장애, 성 정체성을 빌미로 차별을 한다.   


50년대에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이민 온 한 70대 노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편하게 받아들이기는 것이 평생에 걸친 저주였다고 말했다. 세상은 그때보다 나은가? 이민자로서의 삶은 더 나아지고 있는가? 그렇다고 확신 있게 답하지 못하겠다. 다만, 내 안에 스스로를 지탱해 나갈 어떤 근육이 탄탄하게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리고 브런치 글쓰기 작업이 도움이 되리라 믿고 싶다.




참고:

The Chinese experience in British Columbia 1850-1950.

https://www.library.ubc.ca/chineseinbc/headtax.html 


The enduring legacy of Canada's racist head tax on Chinese Canadians.

 https://www.macleans.ca/society/the-enduring-legacy-of-canadas-racist-head-tax-on-chinese-canadian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