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춥지 않은 겨울이다. 눈도 눈보라도 영하의 강추위도 그 무엇도 없는 올 세밑. 하지만 겨울은 겨울인지라 스산한 마음을 녹일 드라마가 없을까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것이 sbs 새 주말 드라마 <스토브 리그>다. 제목부터 열기가 느껴지는, 이제 막 4회차 방송을 마친 따끈따끈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스토브 주변에서 나누는 뒷담들
‘스토브 리그’의 사전적 의미는 프로야구의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각 구단이 팀의 전력 강화를 위해 신인선수의 획득이나 선수들의 연봉협상을 둘러싸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즌을 말한다. 이 시기에 팬들은 난롯가에 둘러앉아 선수들의 연봉 협상이나 트레이드 등에 관해 입씨름을 벌인다. 구단 관계자들 또한 시즌 중에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두느냐를 판가름하는 스토브 리그 동안 어떤 선수를 확보하고 내보낼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치밀한 계산과 전략으로 채워진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드라마 ‘스토브 리그’는 스포츠 드라마가 아닌 오피스 드라마로 분류된다. 소재가 야구일 뿐, 정치드라마나 경제드라마, 또는 성장 서사로 읽힐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좋은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여러 얼굴을 품고 있을수록 의미가 있기에 ‘스토브 리그’는 이에 부합하는 흥미로운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스토브 리그 속에서 발견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겠다.
정치, 언제든 어디서든 발견되는 그림자
먼저 정치드라마로 읽히는 면을 살펴보자. 만년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구단 ‘드림즈’에는 정점부터 하부까지 피라미드의 권력구조가 존재한다. 공식적 정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구단의 모기업 재송그룹 일가이지만, 실질적인 정점은 ‘임동규(조한선 분)’라는 팀내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 플레이어다. 임동규는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 탑클래스 타자라는 독보적 위치를 점하면서도 꼴찌팀 드림즈에서 영구결번으로 은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 일견 의리파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 걷고 보면 자신의 구미에 따라 팀내 선수들의 방출과 잔류를 배후조종하고 라인간 파벌싸움을 방관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조직을 동원하는 등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자의 속성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체제를 흔들지 못하도록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걸어두고 있는 것이다.
임동규의 파워를 감독도 단장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임동규라는 브랜드가 팀의 상징이자 구단 야구용품 판매량의 70%를 차지하는 등 경제적 가치 측면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현실 때문이다.
그런 임동규의 아성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것은 시스템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자 백승수(남궁민 분)가 새로운 단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역사적으로도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변화는 그들에 대한 부정적 경험이나 트라우마를 아직 겪지 않은 주체나 신흥 세력의 유입에서 출발했던 사실과도 궤를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기득권이 흔히 빠지는 그림자가 임동규의 모습에 겹쳐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경제, 빗겨날 수 없는 생의 조건들
다음은 경제드라마로 읽히는 면이다. 드림즈 구단은 야구단이기 전에 구성원들이 삶을 영위하는 토대이자 위계를 가진 조직이다. 구단 관계자들은 기업 소속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운영팀, 홍보팀, 마케팅팀과 같은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여느 기업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빠른 퇴근을 사랑하고 함께 지내는 동안 온갖 가십을 공유하며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비리를 저지르기도 한다. 옆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열정에 찬 양원섭(윤병희 분)과 같은 스카우터도 있지만 스스로가 ‘낙하산’임을 숨기지 않는 한재희(조병규 분)와 같은 신입이 있다. <미생> 으로 익숙한 기업 드라마 속 인물들이 이름과 직함, 연기자의 얼굴을 바꿔 재출연하는 양상이다.
거기에 흙 묻은 야구공, 구단 로고와 상징물로 빼곡이 채워진 사무실 풍경과 같은 디테일들, 과거 사진 속의 선수들이 현재 구단의 이런 저런 관계자로 근무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야구 구단이란 직장은 저렇게 생겼구나 하며 새로운 세계를 구경하는 맛이 생겨난다. 특히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며 선수들의 연봉을 결정하고 구단에 대한 후원 규모를 결정하는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구단주 일가는 그간 재벌 드라마에서 봐 온 행태를 고스란히 반복한다.
그들의 결정은 말할 것도 없이 모기업의 손익계산과 대차대조에 의거하므로 지역연고 구단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나 공헌도, 지역민에게 선사하는 자부심과 즐거움 등은 부차적이기 짝이 없는 무가치한 것들로 환치된다. 현재 드림즈는 현재 연간 70억의 적자를 내는 골칫덩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므로 조만간 잡음 없이 해체한다는 목표 하에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성장 서사? 퇴화 서사!
나머지 하나, 성장 서사의 측면이다. 스토브 리그의 메인 남자 주인공인 백승수는 가히 신의 손이라 할 만큼 출중한 능력을 가졌다. 야구를 글로 배우던 그는 드림즈 신임 단장이 되자마자 드림즈의 권력구도를 꿰뚫어보기 시작하고 변화의 출발점을 정확히 짚어내며 저돌적으로 구단주를 상대하고 무기력한 구단을 재구조화한다. 그가 손댄 팀은 반드시 우승을 하고 반드시 해체된다는 과거는 도리어 그의 매력지수를 높여주는 장치다. 우승이 그의 능력이었다면 해체는 모기업의 지원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백승수의 비극적 서사를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일 뿐이다.
완벽한 백승수 곁에는 그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뉠 만큼 천진난만하고 세상물정 모른 채 열정만 넘치는 젊은 여성 운영팀장, 그것도 운영팀장 경력이 10년이나 된다는 이세영(박은빈 분)이 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두 종류밖에 없다고 믿으며 살아왔을 것 같은 이 여성은, 백승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좋은 사람이 나쁠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틀리지만 옳을 수도 있다는 세상사의 여러 측면들을 보는 온전함을 배우기 시작한다.
언뜻 보기에 스토브 리그는 이세영의 성장 서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완벽한 남성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성숙한 시선을 갖게 된다는, 젊은 여성은 미성숙하고 수동적이며 완벽한 남성을 보완하는 존재라는 위험한 성 역할 고정관념을 전면에 내세우는 용감한(?) 선택을 하고 있다. 바로 지난 달에 종영한 “동백꽃 필 무렵”이 미혼모를 ‘비혼모’로 바로잡음으로써 미혼모 인식을 개선하고 위로했다며 감사패를 전달받는 성 인지 감수성의 시대에 말이다.
스토브 리그의 성공 조건-영리한 대중에게 공을 들여라
우리는 일주일에 50편 이상의 TV 드라마가 방영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 드라마 전문 케이블 채널, 넷플렉스나 IP TV, 인터넷과 모바일 기반의 OTT(Over The Top Service), 또는 유튜브 채널 속의 수많은 웹드라마처럼 언제 어디서나 드라마 소비가 가능한 다매체 다채널의 하드웨어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덕에, 유사이래 가장 높은 눈을 가진 대중들과 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장차 스토브 리그가 손쉬운 예측의 길로 접어든다면-예를 들어 이상과 합리, 보이지 않는 작지만 큰 가치를 추구하는 착한 다수가 경제적 유익만을 추구하고 현실과 손쉽게 타협하며 무사안일과 보신주의의 범주를 맴도는 악의 무리와 대결하고,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을 거친 끝에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플롯의 낌새가 보이기 시작한다면-시청률은 더 이상 오르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곤두박질 칠 가능성이 크다. 앞이 뻔한 이야기를 참고 볼 만큼의 인내심을 장착하거나, ‘내 말이 맞지?’ 식의 점쟁이 모드로 드라마를 소비하는 대중은 이제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드라마를 보는 방식은 예측을 벗어난 전개의 쾌감을 즐기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플롯에 환호하며 시대를 짚어내는 작가의 혜안에 감탄한다. 창작자 보다 먼저 세상을 읽고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며 자신의 지향을 충족시키는 드라마 속 인물을 적극 후원한다.
드라마 창작자들은 시청률 받쳐줄 주인공 캐스팅에 앞서, 이처럼 영리하고 성숙한 대중을 어떻게 설득하고 공감할지를 생각하고 공들여야 한다. 창작자를 견인하는 대중, 미성숙한 창작자를 외면하는 대중의 시대가 열린지 이미 오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