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한 차례씩 만나는 모임이 있다. 열 명 정도가 모여 앉아 한 달간의 주요 뉴스 기사를 톺아보는 모임이다. 세상이 바쁘고 빠르게 흘러가니, 그런 모양의 세상을 쫓아가는 우리의 모임 시간은 늘 짧기만 하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매주 뉴스 기사를 수집하는 숙제를 해가야 한다. 뉴스를 읽고- 스크랩하고- 코멘트를 덧붙이고- 갈무리해서 올리고- 그렇게 네댓 번을 반복하면 금세 한 달이 지난다.
쨍쨍,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8월 말 모임에는 평소보다 적은 인원이 참여했다. 종횡무진 세상만사를 다루며 시끌벅적 논의를 이어가던 참이었다. 평시 공적이고 또 세계적이기까지 한 논의에 여념이 없는 우리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세계시민)들은, 마침 인원이 적은 덕분에 오랜만에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관록이 묻어나는, 카리스마 그득한 이끔이 선생님께서 잠깐 쉬어가자며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지난 8월은 어떻게 보냈나요?"
어라? 그런 말은 없었는데. 숙제만 열심히 해왔는데. 내가 지난 한 달을 어떻게 보냈더라. 부랴부랴 온갖 메모를 가리지 않고 해두는 수첩을 뒤적거리는데, 이끔이 선생님이 끄트머리에 앉은 나를 정확히 향해 눈빛을 쏘아 보내셨다. 끝자리에 앉으면 이런 거 제일 나중에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따가운 눈빛을 끝까지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지원님부터 시작해 보죠."라는 목소리에 우물쭈물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흠흠, 갑자기 말씀 드리려니 생각이 잘 안 나서, 신변잡기적인 걸 얘기해도 될까요?" 이끔이 선생님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을 보고 에라 모르겠다, 한 층 마음을 놓고 두서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오늘 치과에서 오는 길이에요. 8월에는요, 첫 주부터 매주 토요일에 치과를 다니고 있어요.
또, 저는 학생 때 자취하면서는 공부한답시고 방을 잘 안 치웠고,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계속 집 정리를 미루곤 했는데요, 요즘 갑자기 집을 좀 더 아껴주고 가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번 달부터는 조금씩 집 정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늘 '매일 10분씩만' 집 정리를 해보라고 말씀하셨는데 늘 귓등으로 흘리고 말았죠."
나만한 따님을 두고 계신 이끔이 선생님이, 야무지게 한 번 살아보려는 내 모습을 귀엽게 보셨는지 흐뭇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그 미소에 힘입어 말을 살짝 보탰다. "아참, 올해 커트랑 펌을 한번씩만 해두고는 긴 머리라 티가 안 나겠지 싶어 방치를 했었는데요. 거울을 보니까 새삼 머리가 지저분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미용실도 다녀왔어요."
자랑스럽게 나의 월간 업적(?)을 임기응변으로 읊는데, 선생님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해오셨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쌓인 숙제를 해치우듯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 게 하루아침에 마음먹기는 어렵잖아요."
글쎄, 내가 왜 그러고 있지? 마침 한창 뒤적이며 펼쳐둔 수첩 페이지에서 <8월 1일 앞니 깨짐>이라는 여덟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8월 1일에 앞니가 깨졌었지. "8월 1일에 앞니가 깨졌거든요. 앞니에서 시작된 숙제 도장 깨기라고 할까요."
이가 원래 약해져 있었나 본데, 얄궂게도 8월 1일에 딱딱한 걸 살짝 깨물었더니 그길로 앞니가 깨져버렸다. 사실은 이미 아랫니가 깨진 걸 얼마간 방치해오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윗니까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히죽- 위아래로 깨진 이를 거울에 요리조리 비춰봤는데,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오랜만에 치과엘 갔다.
앞니를 치료하면서 오랜만에 했던 스케일링을 시작으로, 이를 전체적으로 씌우는 크라운과 부분을 때우는 인레이, 거기에 젊은 나이에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잇몸치료까지 받았다. 그야말로 안 받는 치료 빼고는 다 받아요, 같은 느낌이다. 만만치 않은 비용에 '설마 이 치과, 나한테 이가 아니라 덤탱이를 씌우나?'라며 의심을 갖기도 잠시, 모니터를 가득 메운 충치 사진에 바로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늘 밖으로 나돌며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고, 또 세상과 나라가 돌아가는 모양에만 신경을 써왔다. 정작 그동안 내 집안은 아수라장으로, 내 입안은 충치 소굴이 되어버렸는데도 그걸 모르고. 비록 앞니는 깨졌지만, 이제부터라도 그간 숨겨왔던 일상의 금을 차근차근 메워 깨지지 않게 접붙여 보려 한다. 그리하여 견고해진 일상과 함께 속까지 꽉 찬 코스모폴리탄이 되리라. 그래서 9월에는 제가 뭘 했냐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