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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Aug 09. 2024

그렇게 집사가 된다

INTJ 집사과 IIII고양이 

나는 갑작스러운 결정은 잘 내리지 않는 사람이다. 

MBTI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INTJ - 그중에서도 각각의 지표가 극단을 향해 치닫는 사람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극 내향형에 극 계획형은 맞는 것 같다.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오지 않을 일을 걱정하며 불안해하고, 그 불안감을 덜기 위해 계획하고, 그러면서 또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불안하고,... 의 연속인 나의 삶. 그러니 정말 갑작스러운 결정은 잘 내리지 않는다. 그런 내가, 어느 날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를 집에 모시고 오게 된다. 


내가 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게 되면... 그건 아마 미국에 홀로 오게 되었기 때문일 거다. 두바이에서 3년 근무 이후, 더운 날씨와 반복되는 업무에 질려 오피스 트랜스퍼를 신청하게 되었다. '극 J' 인간답게 반년 넘게 끙끙 앓으며 준비했고, 간절히 원했고, 그렇게 캘리포니아에 오게 되었다. 문제는 미국이, 혹은 캘리포니아가 어떤 곳인지 전혀 감이 없었다는 것. 장을 보기 위해서는 차를 몰고 가야 할 정도의 미친 크기의 땅덩어리, 늘 가족이 우선인 사람들, 친절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들 - 이런 것들의 조화로 인해 나는 미국에 온 지 3개월이 지나도 통 적응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가족, 친구, 지인, 뭐 아무도 없이 온지라 한 마디로 외로웠다. 


게다가 일도 쉽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컨설팅 - 입을 터는 것이 주된 업무가 아닌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게 미국인 클라이언트들, 그것도 C레벨들 앞에서 자신감을 갖고 입을 터는 것은 참으로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었다. 계속되는 말실수와 당황하면 더 생각나지 않는 영어 단어들... 게다가 아무리 같은 회사 내 오피스 이동이라고 해도, 두바이와 미국은 일하는 스타일이 꽤나 달랐다. 나의 연차에 기대하는 모습이 있는데 나는 신입처럼 허둥대고 있으니 그 모습을 나 스스로가 견디는 것이 어렵고 자신감은 계속 떨어졌다. 


하루 종일 업무 스트레스받고, 해가 지면 친구도 없이 집에 혼자 덩그러니. 게다가 미국 무섭다는 얘기를 들은지라 혼자 밖에 돌아다니기도 싫고 매일 집에만 있었다. 외로웠고, 자연스럽게 (?) 고양이 유튜브 영상만이 내 낙이 되었다. 원래 동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닌지라 왜 떴는지 모를 고양이 쇼츠, 릴스를 하나 둘, 한 시간, 두 시간, 스크롤하다 보니 어느새 고양이로 잠식된 나의 SNS. 그렇게 알고리즘의 축복을 받아 고양이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일이 일찍 끝난 어느 날,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집 근처 고양이 보호소에 찾아갔다. 고양이를 입양하러 간 건 아니었다. 그냥 할 것도 없겠다, 혼자 이렇게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서 고양이 보호소라도 가자 싶었던 것 같다. 그날 당장 고양이를 입양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극 계획형 인간. 고양이를 모셔오자는 충동 결정을 했더라도 (그러나 이걸 했을 가능성 자체가 일단 매우 낮음), 고양이와 동거하기에 필요한 기본 지식과 물품들을 어느 정도 갖추지 않고서는 고양이를 절대 모셔오지 않을 사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고양이 보호소 첫 방문 이후 약 일주일 뒤, 6개월 된 턱시도 고양이를 집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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