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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에 Jan 15. 2020

어느 거짓말쟁이의 고백

인공지능 시대가 두려운 당신은 바로 나!

세계를 설명해야 할 저널리스트와
세계를 만들어가야 할 전략가는
급변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직업이다.



나는 전략가형 거짓말쟁이다. 토마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급변하는 시대의 직업 중에서 저널리스트와 전략가를 구분하여 설명하였는데 나는 굳이 구분하자면 후자에 해당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프리드먼의 의도와 다르게 나는 내 직업이 얼마나 훌륭하고 가치 있는지 감탄하면서 스스로의 일과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신 모순으로 가득찬 감정을 겪어내며 내적충돌에 휩싸이는 혼란스러운 개인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디지털 세상이 가져오는 장미빛 미래를 읊조리며 미래의 일부분을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속이는데 일조한 사람이라는 아이러니를 항상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러니는 내 안에서는 '살아숨쉬는 인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의 마음이 보내는 신호이기도 하다. 지금의 글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파급력을 과장하고, 시장을 키우는데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고, 그럼에도 분명히 발생할 그늘을 외면한 채로 살아가는 작은 현대인의 자기고백이다.




디지털로의 긴 여정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든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다른 이름을 한 동일한 개념이다. 하나는 유럽에서 왔고 하나는 미국에서 왔다. 개념적으로는 급격한 기술과 정보 혁신이 인간의 삶의 형태를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일종의 선언이며 한 시대를 구분하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미래라는 것이 정해진 것인지, 혹은 누군가가 찍은 방향성을 향해 모두가 열심히 달려가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2016년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에는 이 두 개의 단어가 지닌 파급력을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인지하는 세상은 빠르지만 동시에 느리고, 온라인 세상은 시끄러운 정보의 홍수로 가득차 있지만 동시에 오프라인 세상은 고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다. 이제 개인용 PC의 개발과 보급,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약, 이제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내놓은 아이폰의 확산이 디지털 세계로의 전환을 가속화했다는 것을. 변화를 야기시킨 사건은 사소하게 시작했지만 이미 우리의 일상에 완전히 침투해버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몽땅 바꿔버린 것을. 그리고 이 흐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나의 업무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고 반드시 가야하는 디지털 세상을 만드는 것이어다. 기업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을 하며 밥을 벌어먹고 사는 나에게 떨어진 주제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AR/VR, 사물인터넷, 핀테크, 클라우드컴퓨터, 블록체인, 모빌리티 등이 었고 이런 기술을 활용한 비즈니스 방향성과 앞으로의 과제를 던지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이었다. 고액의 연봉으로 검은 수트를 빼입은 회사의 고위 파트너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대기업 고객에게 두려움을 이식했다. "4차 산업은 이미 도래하였으며 디지털로 업의 형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곧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라는 두려움을.


그리고 겁먹은 자에게 당근과 같은 장미빛 미래를 스윽 내민다. "앞으로 다가올 아니 이미 도래한 디지털 시대는 무한한 시장기회(=수익증가), 그리고 기계화와 로봇의 사용에 따른 혁신적인 효율성의 증대(=비용감소) 불러올 약속의 땅이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나의 회사는 디지털 전략, 프로세스혁신, 시스템구축   기업의 A부터 Z 커버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새내기  주니어였던 나의 역할은  거대한 프로젝트의 아랫자락에서 두려움을 극대화하고 장미빛 미래를 더욱 빛나게   있는 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여러 전망 기관에서 발행하는 각종 통계 수치를 찾고 자동화에 따른 인력감축 효과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도   하나였다.




Digital vs. Human

내 행동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특히 자동화와 노동 간의 Trade-off 관계가 불러올 파급을 모르지 않았다. 로봇과 일자리 이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공지능으로 무장된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비관론과 오히려 생산성을 증대시켜 불필요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충돌하고 있다. 진실은 비관과 낙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따지고보면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이 인간의 존엄성을 얼마나 쉽게 망가뜨리는지 너무도 가슴 아프게 보여준다.


34년을 이 회사에 내 모든 걸 바쳤소.
그런데 이제 내 보험료조차 못 내는 신세가 되어야 한단 말이오!
오렌지만 까먹고 껍질을 던져버릴 순 없소.
사람이 과일 나부랭이는 아니잖소.


늙고 노쇠하여 전국곳곳을 돌아다니며 세일즈영업을 할 수 없는 가장 윌리 로만은 하루 아침에 해고 당하고 위에 말처럼 항변한다. 당시 최첨단 신기술과 자본주의 논리를 양손에 쥔 젊은 사장 하워드는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일이죠" 라는 말로 윌리의 항변을 일축한다. 윌리의 이러한 외침도 슬프지만 더욱 안타까운 장면은 건강을 이유로 내근직을 요청하는 윌리는 주급 60달러, 50달러, 40달러로 스스로가 자신을 상품처럼 낮게 흥정하는 장면이다. 인간이 돈과 기계 아래에 놓이게 되는 순간이며 아서 밀러가 정확하게 포착한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의 파티장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현실의 포착이다. 세상의 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직업 속에서 내가 경험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1950년에 쓰인 <세일즈맨의 죽음>은 오늘날에도, 아니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을 알기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기계와 로봇이 나의 일자리마저 뺏어가버릴 것이다. 효율성이라는 명목하에. 일자리를 빼앗긴 자는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 것일까? 기술의 발명이 누군가의 삶에서는 축복과 경탄이지만 다른 누군가의 삶에서는 비극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라온다는, 나약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진리는 인류로 하여금 앞으로만 나아가게 만든다. 위기를 느낀 젊은이들은 로봇이 쫓아올 수 없는 역량인 창조적 능력을 최후의 보루로 삼기 위해 자기 계발을 계속한다. 이 또한 내가 하는 일이다. 디지털로 업의 형태를 바꾸는 프로젝트를 통해 점점 인간이 설 자리를 내 손으로 치워가면서 동시에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당장 내가, 가장 열심히 고군분투한다.




칵테일 잔 거둬가기

물론 낙관론 만큼 비관론은 지나치게 극적인 면이 있다. 기술은 인간의 삶을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란 주장 역시 납득할 수 있을만큼 논리적이다. 불필요한 업무는 줄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일에 개인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인류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면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직업인으로서의 내 마음 한켠에 자꾸 일렁이는 반대편 목소리를 무시하기도 어렵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질문만은 던질 수는 있다.


소위 '프로불편러' 같은 나의 염려는 한창 무르익어가는 파티에 찬물을 끼얹는 불필요한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어도 그림자를 인지할 순 있어야하지 않을까? 적어도 모두의 눈과 귀를 가린 채 일부 선택된 자들만 빛으로 데려가고 나머지를 그림자로 던져버리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딜레마를 방지하기 위해 한창 무르익어가는 파티의 분위기를 깨고, 칵테일 잔을 거둬간 후 춤을 추는 것을 멈추고 잠깐 생각해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 지나친 것일까?


나는 기술 전문가도, 철학 전문가도 아니어서 어느 쪽이 옮은 지는 여전히 모르며,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도 알고 있다. 내가 고민해서 무엇이 바뀌지라는 비관론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전략컨설팅의 세계에는 20대 80의 법칙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 20에 집중하면 나머지 80은 따라온다는 효율성에 입각한 원칙이다. 그렇지만 효율성은 언제나 폭력적이지만 언제나 효과적이다. 그래서 나 역시 외면하는 손쉬운 선택지를 택한 적이 있다. 가난을 피하고 눈에 좋은 것만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답을 찾을 수 없는 내 무기력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최소한의 용기로 내 부끄러움을 고백하고자 한다. 이 목소리가 큰 것을 변화시킬 순 없겠지만 그래도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나 여기있다고 외쳐본다면 누군가는 들어주지 않을까, 예상한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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