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내가 이렇게 글을 잘 썼나?’
글을 쓸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은 글마귀의 유혹이다. 글마귀에게 홀렸을 시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증세는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히는 것인데, 문제는 그가 쓰도록 종용하는 글이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그러니까 안 쓰느니만 못한 글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글을 쓰기 전 노트북 앞에 앉아 스스로 몇 가지 질문에 답하며 상태를 점검한다.
첫 번째 질문, 새벽인가?
두 번째 질문,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상태인가?
세 번째 질문, 지금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안타깝거나, 화가 났거나,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가?
위의 질문 중 하나라도 ‘예스’일 경우 미련 없이 노트북을 덮는다.
이 체크리스트를 진작 가지고 있었더라면 셀프로 빚은 흑역사의 반 정도는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웬만하면 그러지 않지만 한때는 요령도 속절도 없이 글마귀에게 홀리는 바람에 말도 안 되는 글을 참 많이도 썼다. 그들은 주로 몸과 마음이 더없이 말랑말랑해지는 시간인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에 찾아왔다. 무방비 상태의 나는 글마귀의 작은 속삭임에도 크게 휘청거렸다. 글마귀는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약점을 아주 잘 후벼 팠다. ‘네가 사랑하는 만큼 그도 너를 사랑할까?’ ‘열심히 일하는데도 너는 왜 가난하지?’ ‘세상이 너의 노력을 너무 몰라주는 거 아닐까?’ 등등.
그러다 보면 과거에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던 상황들까지 과장되게 와닿으면서 내 처지가 서글퍼졌다. 밤의 어두움과 고요 속에서 나는 더 어둡고 고요해지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은 눈물이 날 정도로 스스로가 가여웠다. 지금 생각하면 글마귀가 수지맞은 날이었다. 글마귀의 수작에 놀아나는 바람에 순식간에 농도 짙은 자기 연민에 지배당한 나는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다. 글을 쓰자! 글이 아니고서는 이 상처를, 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글마귀의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동공이 풀린 채로 글을 썼다. 제대로 홀린 상태였기 때문에 내 손끝으로 짓는 한 글자 한 글자에 그야말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다 쓰고 난 뒤에는 두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내가 이렇게 글을 잘 썼나?’ 그렇게 쓴 장문의 글은 연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형태로, 때로는 공개된 SNS 게시글의 형태로 내 손을 떠났다. 나는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공감하거나 칭찬할지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사실 그것은 글마귀의 진짜 저주가 아니었다. 글마귀의 진짜 저주는 아침이 밝아서야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주는 쪽팔림을 닮아 있다.
다음 날 아침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아, 나 어제 똥글을 퍼질렀지’ 하는 생각에 가슴 언저리가 불쾌하게 두근대기 때문이다.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이미 손쓸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내 글을 확인한다. 전날 새벽에 감탄하며 쓴 글이 분명하건만 글마귀의 환각이 가시고 난 뒤에는 부끄러워서 봐줄 수가 없다. 기름기가 뚝뚝 떨어지는 이따위 느끼한 글을 쓴 사람이 나라니. 혼란한 패배감에 휩싸인다. 연인의 당황스러운 답장(‘?’ ‘갑자기 왜 그래?’ 등)이라든지 SNS 게시글에 달린 댓글들(‘자라’ ‘ㅋㅋㅋㅋㅋㅋ’ ‘새벽감성’ 등)을 확인할 때면 차라리 먼지처럼 허공으로 흩어지고 싶어진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글마귀에게 농락당해 쏟아낸 똥글이 과연 몇 개나 될까.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사실 세어볼 의지도 용기도 없다. 이제 와 드는 생각은, 나야 똥글을 써낸 죄인으로서 아침의 쪽팔림을 죗값으로 치른다지만, 단잠에서 깨자마자 내 똥글을 읽고 소름 끼쳐 했을 내 님들은 무슨 죄였나 싶어 미안하다.
글마귀에게 홀리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새벽에 쓰지 않는 것이다. 새벽에는 그냥 제발 잠을 자자. 그들의 저주는 생각보다 강력하기 때문에 되도록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실제로 15년 전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에게 보낸 메일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쪽팔리다. 정말 지독하게 오래가는 저주가 아닐 수 없다.
topclass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