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의 생일>(이와사키 치히로, 창비, 2018)
생일生日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태어난 날, 또는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해마다의 그날’을 뜻한다. 이미 ‘생일’이라는 낱말 자체에 축복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태어남 자체가 환대이다. 이 환대의 생일을 따뜻한 감성과 동심으로 표현하는 그림책 작가가 있다. 이와사키 치히로. 그는 국내에서 <창가의 토토> 그림작가로 널리 알려졌다. 치히로가 그림책 작가가 된 계기는 남다르다. 원치 않는 결혼에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미안함과, 전쟁 가해국의 국민으로 느끼는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때문이었다. 치히로는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면서 반전 반핵운동에 앞장섰었고, 일본 어린이를 평생의 테마로 따뜻한 인간 감성과 동심을 그렸다. 197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작은 새가 온 날>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그래픽상, <전쟁터의 아이들>로 라이프치히 국제도서전 일러스트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어린이처럼 투명한 수채화의 작가’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눈 오는 날의 생일>(창비, 2018)은 치이가 자신의 생일 하루 전, 촛불 다섯 개를 한꺼번에 끌거라는 기대와 두근거림으로 시작한다. 내일은 치이의 다섯 번째 생일이다. 오늘은 동무의 네 번째 생일이다. 치이는 카드와 선물을 들고 동무의 집으로 간다. 이미 와 있던 친구들은 치이가 늦었다며 수근거린다. 치이는 흔들리는 촛불 네 개를 바라보며 내일 자신의 생일에 대한 기대로 얼떨결에 친구의 촛불을 불어 버린다. 순간 벌어진 일에 당황했던 치이는 친구들의 놀림을 뒤로 하고 생일잔치 자리에서 나오게 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창피함에 스스로 토라진 치이는 밖에서 헤매다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돌아간 치이는 엄마한테 생일 같은 것도 싫고 생일날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치이는 별님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그림책은 생일을 앞둔 치이의 마음을 조근조근 따라간다. 생일 전날 치이의 설레이는 마음과 친구 생일잔치에서 했던 실수로 인한 당혹스러움과 속상함, 그리고 상처. 치이는 자신이 한 실수에 스스로 마음 문을 닫고 방황한다. 집으로 돌아온 치이는 괜시리 엄마에게도 뾰족하게 굴고, 강아지 포치도 싫다. 하지만 작가는 누구나 실수 할 수 있다고 속삭이며 치이를 보듬어주며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치이는 혼자 생각하며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마주한다.
별님 별님
내일 생일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엄마한테 말했지만
정말은 딱 하나 바라는 게 있어요.
내일
새하얀 눈을 내려 주세요
내가 태어났던 날처럼
치이의 상처받은 마음을 낫게 해준 건 생일날 내린 눈과 엄마가 준 빨간모자와 장갑, 그리고 찾아 온 친구들이었다. 치이에게 눈과 엄마, 친구들은 사랑이었고 환대였다. 생일은 단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환대를 받는다. 까닭없는 환대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축하 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환대는 그 어떤 아픔도 낫게하는 힘이 있다, 치이가 그랬듯이. 어린시절의 환대는 지금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고, 현재의 환대는 앞으로 살아나갈 힘을 주기도 한다.
<눈 오는 날의 생일>은 실제 겨울에 태어난 작가 유년의 추억이 깃든 작품으로 생일을 앞둔 아이의 설레는 마음을 잘 드러낸다. 그럼에도 치히로는 세밀한 표현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하이쿠 작법에 영향을 받은 작가는 시적인 언어로 독자를 맞는다. 해서 어떤 독자들은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시적인 언의 감상과 풍부함을 맛볼 수도 있다. 또 작가가 던져준 여백은 치이의 마음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경로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치히로가 들려주는 듯한 방식을 따라가다 어느 새 치이의 마음에 이입되어 보듬고 있는 자신을 만날테니.
사람은 누구나 사랑 받으면 사랑하고, 미움만 받으면 미움을 키워나간다. 치히로는 이 단순함의 진리를 환대로 풀어나간다. 치이의 말과 생각을 반갑게 맞아 정성껏 보듬고 살펴준다, 눈과 엄마와 찾아온 친구들처럼. 치히로는 치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치이의 마음으로 느끼고, 치이의 몸으로 체험한다. 옮긴이 엄혜숙은 일본 인명을 한국식으로 바꾸던 그림책 번역의 관행을 깨고, 작가의 어릴 적 애칭이기도 한 주인공 이름 ‘치이’를 그대로 살렸다고 했다. 이는 작가가 아이의 말과 언어로 세상을 보고자 한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겨울이다. 추운 겨울을 따듯하게 상기할 수 있는 건 포근히 내리는 눈,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는 환대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환대가 새하얀 눈처럼 소복소복 쌓이는 겨울이길. 한편의 수채화와 환대 가득한 <눈 오는 날의 생일>, 생일 날의 까닭없는 환대를 마주해봄은 어떤가. 이 겨울이 따뜻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