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회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간단 정리
저는 영화를 통해 제 자신, 저를 둘러싼 사회를 고민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영화에 자연스럽게 끌립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나라 영화제 중 규모도 가장 크고 사람들도 가장 많이 모인다고 알려진 제 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제가 본 몇몇 영화를 돌아보려 합니다.
영화는 세상의 단면을 포착해 다시 직조하고 그 씨실과 날실은 보는 이의 머리와 마음에 남아 발아합니다. 특히 제 안에 뿌리내려 저를 한층 더 깊게 만들어 준 영화들을 고르고 골랐습니다. 공개된 시놉시스를 지나치게 넘어서는 스포일러는 최대한 배제했고 말미에는 영화 배경에 관한 정보가 있는 경우 적었습니다!
나열된 순서는 대체로 인상 깊은 순서입니다 :)
이번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더불어 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과는 내용이 다르지만 비참함을 여과없이 묘사한다는 사실만큼은 비슷합니다.
이 영화는 파리 외곽의 몽페르메유 지역에서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경찰 공권력이 공동체, 사회, 그리고 구성원 개인에 미치는 영향을 조명합니다. 공동체는 파벌로 나뉘어있고 그 파벌의 규칙이 법으로 행세하는 공간입니다. 사실상 법이 없는 공간에서 행사되는 권력은 쉽게 자의적인 성격을 띠고 끝을 모른 채 극단적인 성격으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그 극단을 통해 역설적으로 법이 존재하지 않는 무법의 본질이 보이더군요.
미국에서 흑인을 상대로 지나친 경찰력 집행이 문제가 된 경우가 있었죠. 아직 우리나라는 그만큼 구설수에 오를 사건이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극단적으로 행사되는 그 권력이 꼭 경찰력일 때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적인 힘이라면 더욱 심각한 결과를 낳겠지만 생각해보면 분명 우리 주변의 미시적인 힘들도 비슷한 문제를 낳습니다. 가족 구성원, 직장 상사, 선생이나 교수들의 힘이 그릇되게 행사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공권력이 하나의 법으로 자리한 공간에서 구성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 공간은 오히려 무법의 공간이 돼버리진 않을까요? 이 영화는 이러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유보하는 대신 비참함을 주제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영화 속에서 자의적 권력의 영향을 받는 많은 사람들뿐 아니라, 직접 영향을 행사하는 경찰관들, 나아가 그 구역과 공동체 전체가 서로 조금씩은 다른 비참함에 묶여 있는 듯합니다.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들이라면 눈물이 전혀 나지 않을 것 같은 장면들에서 눈물을 흘리실 수 있습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통역해주시는 분도 울면서 보느라 목이 메어 통역을 잘 못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의 직간접적인 경험이 녹아있는 작품이라 더 와닿는 느낌도 있습니다. 개봉이 확정된 영화인데 언제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개봉하면 한 번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신화의 형태를 띠지만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비극적인 내용을 담은 인도 영화입니다. 영어 제목에서 보이듯 Unfair-y, 즉 정의롭다 못해 부조리한 상황을 담은 동화가 아닌(Unfairy Tale) 이야기, 실은 동화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 바깥(Outcast) 불가시천민 출신 여자아이가 Maadathy라는 가상의 인도 여신으로 승화하는 신화를 다룹니다. 인도에는 다양한 신들이 있는데 고귀하게 희생한 인간들이 죽은 후에 신의 자리에 오르는 신화가 많습니다. 하지만 카스트 제도 바깥에 있는 인간이 신이 됐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 부재와 공백을 이 영화는 불가시천민이라는 계급에서 씁쓸하게 채워갑니다.
불가시천민은 보는 것만으로도 더러움이 옮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가촉천민이 '더러워서 닿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불가시천민은 이들보다도 '천한' 취급을 받습니다. 아예 눈에 띄면 안 되기 때문에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을 피해서 활동하고(이른 새벽이나 아주 늦은 밤) 그들과 마주칠 것 같으면 몸을 숨기고 자신을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몸에 방울을 달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쯤 설명하면 예상이 되실 것 같습니다. 주인공 여자아이와 가족, 그리고 불가시천민 공동체가 겪었을 억압, 차별, 고통이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그래서 마주하기 어려웠지만, 인간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차별과 억압을 감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감독님은 인도에서 아직 만연한 소수자 차별 문제를 주제로 영화를 찍고 계신다고 해요. 근데 이런 주제는 지원을 받는 것은 물론 심사를 통과하기조차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한 장면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법정까지 가셨다고 하니까요. 그만큼 소중하게 나온 영화입니다. 개봉소식은 따로 없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어로 검색하면 Imdb에는 나오니 참고해도 좋겠습니다.
어떤 거짓말은 하얗게 포장됩니다. '선한 의도' 때문이라서 그럴 텐데 과연 어떤 의도가 선한지, 의도가 선하다고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경험상 거짓말은 의도가 어떻든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그렇게 돌아올 때는 제 의도를 전혀 고려해주지 않은 채 혹독하게 밀려오니까요.
이 영화는 자신을 암 환자라고 속이는 한 학생이 거짓말을 유지하면서 겪는 긴장감을 다룹니다. 모금 활동을 통해 생활하던 주인공은 자선 단체에서 기부를 받으려고 하지만 의료 기록을 제출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없는 병을 있다고 주장하는 주인공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안 들키려고 기를 쓸 때의 느낌,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영화는 그 순간의 생각과 감정을 주인공을 통해 너무도 잘 표현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말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면서 봤지만 나중에는 어라? 저건 진실인 건가?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도 헷갈렸습니다. 보다 보니 이런 질문도 떠오르더군요. 과연 거짓을 진실처럼 체화할 수 있다면 그건 진실이 되는 걸까요? 거짓말을 진실과 명확하게 가르던 경계가 영화를 보면서 얼핏 흐려졌습니다.
저는 심리를 표현하는 영화를 자주 찾아보는데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개봉 예정작이니 개봉하면 한 번씩들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시는 고요해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표현하는 시인의 감성이 절대 정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여시인들과 비교했을 때 윤동주와 그의 시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가 고민한 흔적은 바래지 않은 채로 치열하게, 역동적으로 다가옵니다. 다만 내면의 역동성이 표현되는 방식은 그 시인의 깊고 깊은 곳, 본질에 따라 다를 수 있겠죠.
이 영화는 시인의 본질이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방향을 느린 호흡으로 다룹니다. 주인공은 파트너로 일하고 있는 현금수송원 빅토르와 레샤입니다. 둘은 모두 전쟁에 참여한 군인으로 자신의 경험을 살려 현금수송원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빅토르는 일을 쉴 때 시 수업을 듣고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나름 잔잔하고 무던하면서 감성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레샤는 이따금 그를 따라가지만 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도 대충 막 사는 편입니다. 야속하게도 지루하게 시 수업을 듣다가 툭, 아무 시나 던지는 재능은 레샤가 더 풍부합니다.
무기를 들고 물리력을 전제하는 일과 시를 쓰는 취미. 이 조합은 처음에 되게 묘했지만 영화가 흘러가면서는 두 영역이 하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빅토르와 레샤의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주인공들의 내면을 다채롭게 뒤흔듭니다. 그 결과가 빅토르와 레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찬찬히 살펴보는 과정이 제게는 이 영화를 보는 묘미였습니다.
현금수송원 시인들, 즉 한편으로는 매우 터프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면에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고 그 본질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이들에게 영화의 제목인 '위대한 시'는 어떤 시인지 생각하면서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태생적이어서 숙명적인 외로움이 존재합니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어도 짜장면을 싫다고 하시는 어머니가 있다면 아이는 느끼지 못하는 새, 따뜻함 속에서 자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의 과거에는, 그런 최소한의 따뜻함도 느끼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1948년부터 60년까지 정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때 정글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참상을 피해 정글 밖으로 보내졌습니다. 아직 채 젖을 떼지도 못한 아기들이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손에 길러졌습니다.
영화는 그 중 한 아이의 외로움을 조명합니다. 아이의 어린시절과 갓 대학에 들어간 청년시절을 조금씩 병치하면서 바라봅니다. 외로움을 처음 마주하던 시절 하나, 그 외로움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멀어졌을(혹은 그러기를 희망했을) 시절 하나 사이를 옮겨가면서 아이의 외로움을 역사적 배경과 연결합니다. 그 연결 속에서, 본질적인 외로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아주 오랫동안 절대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주제였다고 합니다. 감독님의 할아버지도 공산당원이었는데 몇 년 전에야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찾게 됐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가족의 정보를 찾은 감독님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랍니다. 아직도 그 시기를 살아가던 자신의 가족이 공백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까요.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이 문득 스쳐 지나가네요.
"네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자유를 보장한다. 그렇지만 너는 우리의 믿음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
이 영화를 요약하는 대사입니다. 자유는 가장 가치 있는 개념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지만 정말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말뿐인 자유에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놓고 정작 분위기는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조성된 공동체가 주변에 없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종교를 믿지 않는 소년이 천주교 기숙학교에 와서 겪는 일들을 다룹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학생, 선생이 천주교도이고 모든 행사에는 기도가 뒤따릅니다. 소년은 그 어느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일체의 종교적 행위를 거부하지만 돌아오는 건 따가운 눈초리죠. 맨 첫 줄의 대사는 학교 교장선생님의 대사를 제가 기억 나는대로 적은 겁니다. 주인공이 '엇나간다'고 생각하는 교장은 주인공에게 마음대로 생각할 자유가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믿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습니다.
느끼셨을 수 있지만 '무시', '조롱'은 받는 사람의 해석에 많이 좌우됩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방법 중 많이 언급되는 내용이 바로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면 의도가 어찌 됐든 적절하지 않은 말이라는 겁니다. 상대를 생각하면서 말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표현이 폭력으로 둔갑합니다. 주인공이 믿음을 '무시'했다는 말은 단일한 믿음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에서는 매우 자의적인 현실인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어느 정도의 사실이 있다고 해도 결국 주인공이 고까워서 찍어누르는 말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죠. 다시 말해 이는, 허울뿐인 자유를 들먹이며 오히려 그를 종교적 믿음에 옭아매려는 하나의 장치로 활용될 위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초월적 존재도 믿지 않는 제 입장에서 이 영화는 참 끔찍했습니다. 꼭 어떤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이 아닙니다(저는 종교의 순기능이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생각을 정립해가는 시기에 있는 한 학생이 자기 내면의 믿음조차도 온전히 지켜내기 어려워하는 상황 때문입니다. 마치 밀폐된 공간 양쪽에서 점점 좁아드는 벽에 압사당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머니에게 충격이 될 만한 말을 하셔야 했던 경우가 있으신가요?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을 고치고 또 고쳐봐도 도무지 상처를 주지 않고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말이, 아주 자연스러운 내 지향에 관한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이 영화는 성소수자인 아들 반이 자신의 애인 이안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후 생기는 일을 풀어냅니다. 반은 어머니에게 애인을 소개하고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힐 생각이 있지만 어쩐지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장남으로서, 여자를 빨리 만나 결혼을 해 집안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변 어른의 말들이 부담스럽고 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애인 이안이 상처 받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는 상황입니다. 설상가상, 반은 어머니가 아파서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머니에게 부담을 줄까봐 자신과 이안의 관계를 털어놓기 더 어려워 합니다.
제게도 성소수자 친구들이 있습니다. 친한 지인에게만 공개한 친구들도 있고 연애, 사랑에 관한 주제가 나올 때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서슴없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후자의 친구들은 겉으로 보면 굉장히 당당하고 씩씩하지만 속으론 '곪아터졌다'고 말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친구는 가족에게만은 절대 밝히지 못하기도 하더라고요.
그 어려움이 어떤 느낌일지 섣불리 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 영화를 통해 아주 조금, 또 한 번 다가가보려 애썼습니다. 제 친구들의 아픔이 함께 떠올라 더 아팠던 영화였습니다.
현기증은 신체가 공포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그곳은 현재 나에게는 공포스러운 공간이고 그만큼 위험하니 당장 피하라는 신호라는 뜻이라는 의미에서요. 이 영화는 현기증을 뜻하는 Vertigo를 발음 그대로 옮겨오면서 대한민국의 한 여성 인턴이 일상의 공포에 대응하는 상황을 그려냅니다. 그러면서도 그 상황에서 '버티고' 버텨내는 삶을 표현합니다.
현기증은 높이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는 듯합니다. 물리적 높이도 있지만 사회적, 관념적 높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 학교에서의 따돌림, 혐오시설이라며 장애인 학교를 반대하는 시위 속 폭력들. 이는 분명 위계적으로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아래를 향해 갖은 힘을 발휘하는 모양새입니다. 다시 말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누군가가 그렇지 못한 누군가를 내리누르는 무서운 상황입니다. 이런 공포에 대응하는 방식이 현기증이라면, 현기증은 어쩔 수 없이 높이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 아닐까요?
주인공 서영은 높은 곳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일을 합니다. 분명 안정적인 듯하지만 서영에게는 사무실이 기울어지고 흔들리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서 서영은 곧잘 현기증에 시달립니다. 이 현기증은 어디에서 유발할까요? 영화는 일상의 공포, 공포를 마주하는 자세, 자신과 다른 종류의 공포를 이겨내는 누군가, 그리고 그 누군가와의 교류를 통해 공포의 명확했던 경계가 흐려지는 상황을 모두 다룹니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유쾌한 연기를 보여주신 배우 천우희 씨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천우희 씨가 나온 영화를 우연히 많이 봤는데 항상 인상 깊었습니다. <마더>, <써니>, <곡성>, 그리고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참극 <한공주>까지 어느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캐릭터가 없었어요. 그래서 특별히 현장구매까지 한 작품인데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봉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개봉하면 한 번 보셔도 좋겠어요 :)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현실의 단편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영화들은 세세하게 조명했습니다. 미처 다 적지 못한 영화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여덟 개의 영화만 해도 배경이 되는 국가나 문화가 다 다릅니다. 의도한 게 아니라 적을 영화를 선정한 후 다시 살펴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곳의 실상이 영화들을 통해 표현됐다는 의미겠죠.
각기 다른 사회, 문화에서 발아하는 현실은 복잡한 얼개들로 이뤄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영화라는 장르는 그 얼개를 파헤쳐 문제를 끌어내고 또 조명해서 현실의 중요한 단면을 우리에게 던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영화를 통해 세상에 남아 있는 문제적인 주제를 마주할 때마다 부디 저와, 영화를 보는 다른 모든 이의 머리와 마음에 문제의 발아가 끝없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
2019.10.18 W_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