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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KIM Sep 02. 2020

무위의 시간

 나에게로의 여행

2015년 1월 룩셈부르크의 작은 호텔방이다. 방은 4평 남짓이었을까? 침대 하나와 14인치로 보이는 작은 TV, 노트북 하나 올려 놓을 수 있는 작은 책상이 다였다. 창문 밖으로는 호텔 뒷마당이 있었는데 몇 그루의 나무와 잔디가 심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룩셈부르크도 전반적으로 조용한 곳이었기에 도시와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고 기억하고 싶었지만, 와이파이도 심심찮게 잘 끊어졌기에 이 호텔은 불면증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해주면 좋겠다는 걸로 기억하기로 했다. 나는 이곳에서 두 달을 보냈다. 두 달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숙면이 기가 막히게 이어졌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조용한 곳에 사람이 혼자 가만히 있으면 미친다고 했었다. 그래서 였는 지 모르겠지만, 나는 별의별 상상을 하면서 심심함을 달래게 됐다. 호텔의 로비에서 친해진 한국계 독일인과 썸을 타고 함께 룩셈부르크를 탈출한다든 지, 룩셈부르크 한인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한인타운까지 발전시킨다든 지, 케이팝을 좋아하는 약국 직원에게 룩셈부르크어를 배우는 대신 한국어를 가르쳐줘서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고 노벨언어평화상을 받는다든 지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었다. 이런 상상을 하다보면 어느새 아침에 눈을 뜨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사이렌 소리가 나는 날이 있었다. 


한밤 중의 사이렌 소리는 참 무서운 생각을 하게 한다. 말이 안 통하니까 뭔가를 알아볼 수도 없었는데 사이렌 소리는 거의 2시간동안 울렸었다. 다음 날, 로비에서 말해주기를 간밤에 투숙객 중 한 사람이 심장마비가 와서 응급차가 출동했었다고 했다. 그 때부터 나의 상상은 무겁고 진지해졌다. 마침내 내가 아무 연고도 없는 룩셈부르크에서 사고를 당해 삶을 마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하게 됐다. 


그리고 이 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든 휘발될 수도 있으니 나라도 나를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방학숙제 일기도 안 썼었는데......


3월 중순, 중국 출장을 가기 위해 인천공항에 갔다. 해외로 나가는 것이니까 기분이 조금 들뜨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록 나의 행색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든 비즈니스맨과는 거리가 먼 청바지에 후줄근한 후드티를 입은 모습이지만, 적어도 나도 비즈니스 하러 가는 거니까 절반은 영화 주인공과 같다고 합리화하며 괜히 바쁜 척도 해본다. 행복한 여행을 기대하는 단체여행객들과 이제 해외여행은 지겹다면서 또 탑승을 기다리는 아주머니들도 들떠 있으니 나만 이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알까? 숙소는 정말 잘 골라야 한다는 것을…... 


룩셈부르크 이후로 혼자 있는 시간을 아주 소중히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혼자 있으면서 내가 해야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은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평소에 이런 시간은 없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청소, 설겆이 빨래처럼 끝이 없는 집안일이 있고, 겨우 쉴 시간이 생겨도 나도 모르게 인터넷 뉴스를 보거나 웹서핑을 하게 된다.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켜놓은 TV 영화에 빠져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극한의 정신력을 발휘해서 TV를 켜지 않으면 친구들이 메신저로 부르고, 기껏 메신저도 끄면 모바일 게임이 접속하라고 팝업을 띄운다. 이쯤되면 방해하는 것들을 없앨 기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고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혼자 쉬지만, 나를 보는 시간은 없다. 


이런 점에서 공항은 가장 좋은 공간이다. 나를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누구나 잠시 지나쳐 가기만 하는 공간이고 내가 해야할 일은 대기밖에 없다. 하물며 이곳은 한국말을 듣기도 쉽지 않다. 또 나도 곧 떠날 공간이기 때문에 이 공간에 애정을 쏟지 않는다. 그래서 공항에서는 내 몸과 마음이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가장 자유로운 곳은 룩셈부르크겠지만…... 


그래서 공항에 도착하면 늘 멀고 새로운 곳과 가깝지만 익숙한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도착한 중국은 생각보다 미세먼지가 없었다. 오토바이는 거의 전기오토바이였고 차들도 전기차가 대부분이었다. 매연이 거의 없다보니 천천히 걸어다니기에 좋았다. 빠른 경제성장으로 생겨난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시선을 끌지만, 아직은 낡은 건물도 많고 무법천지 교통법규 위반도 상시적인 것이 역동적이면서도 야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보통 야생이 아니라 디지털 야생이었다. 특히 현금과 카드는 받지 않고 중국의 모바일 페이로만 결제되는 음식점이 제일 신기했다. 음식은 다 먹고 계산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니까 말도 안 통하는데 너무 난감했었다. 


하마터면 중국감옥에서 룩셈부르크보다 자유로운 경험을 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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