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 KIM Jun 30. 2024

영화 <At Eternity's gate>를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고흐

화가 고흐는 어렸을 때부터 일상생활에서 듣게 되고, 그림도 몇 번은 봤었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림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그동안은 일상에서 감흥이 그리 크지 않았었다. 부끄럽게도.

그러던 중 2022년 9월, 처음으로 민화를 그려보면서 물감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체험해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세한 색의 변화를 자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물감 자체를 얼마나 세심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석채와 분채, 기름 물감의 색감 차이는 상당히 컸다.


바로 그때, 내가 생각난 그림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론강의 별밤>, <밤의 카페 테라스> 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 링크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the-starry-night/bgEuwDxel93-Pg?hl=ko&ms=%7B%22x%22%3A0.5%2C%22y%22%3A0.5%2C%22z%22%3A9.002404734526685%2C%22size%22%3A%7B%22width%22%3A2.058860723901938%2C%22height%22%3A1.2375000000000005%7D%7D)

(론강의 별밤 링크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starry-night/uQE3XORhSK37Dw?hl=ko&ms=%7B%22x%22%3A0.5%2C%22y%22%3A0.5%2C%22z%22%3A9.401091186300244%2C%22size%22%3A%7B%22width%22%3A2.0086957370558465%2C%22height%22%3A1.2374999999999998%7D%7D)

(밤의 까페 테라스 링크 https://www.google.com/search?sca_esv=a20aa9bca0718a85&rlz=1C5CHFA_enKR719KR723&q=%EA%B3%A0%ED%9D%90+%EB%B0%A4%EC%9D%98+%EC%B9%B4%ED%8E%98+%ED%85%8C%EB%9D%BC%EC%8A%A4&udm=2&fbs=AEQNm0DmKhoYsBCHazhZSCWuALW8l8eUs1i3TeMYPF4tXSfZ96qP8jk59Ek0sz1u1YABeO8GQ8vqOMhD8b-GK4TTzL2EmJWFiIqspVmVDfbTwtN4yVj_CW2PKzrkGW18cHQAvih2zLh0EwJ43T03uDjfdHZE8dOYl_6sIlrOoaQBS_UZ6lwXk7PnVPoYYkbUuiGieD9EokDt&sa=X&ved=2ahUKEwiGpq_Wy4KHAxXHrlYBHTksDgAQtKgLegQIDRAB&biw=1435&bih=683&dpr=1)

*. 인터넷 상의 색상보다는 역시 전시회에서 실제 보는 게 훨씬 색상이 선명하고 다채롭다. 특히, <론강의 별밤>은 천지차이다!


내가 고흐 그림이 떠올랐던 이유는 주로 파란색 계열과 노란색 계열의 색만으로 사물의 형태, 명암, 분위기, 특징과 느낌을 모두 표현해냈다는 점이다. 하나의 색상으로도 세세하고 독창적 느낌까지 표현한 것이 유독 더 대단하다고 느껴졌었다. 지인의 말에 따르면 고흐는 그렇게 세상이 보여서 보이는대로 그린 결과라고 하던데, 그의 정신병 유무와 별개로 나에게는 고흐의 독창성이 그제서야 더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물론 밤은 주로 어두운 파란 빛으로 세상이 덮이고 낮에는 노란 빛으로 가득채워지긴 하지만, 그때 나는 색을 저렇게 디테일하게 만들어서 그려낸다는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번 고흐를 다룬 영화 <At Eternity's gate>가 반가웠고, 보고 싶었다. 알게되자마자 유튜브 영화에서 구매 결제하고, 주말에 차분히 봤다. 이 영화를 알게 해준 분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이 영화에 꽂히게 된 대목이다. 영화 후반부, 고흐의 그림 모델이 된 의사와의 대화 내용이다.


의사 : "왜 그림을 그리나요?"

고흐 : "생각을 멈출 수 있어서요."

의사 : "일종의 명상이구나!?"

고흐 :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생각을 멈춥니다."

의사 : "무엇에 대해서?"

고희 : "생각을 멈추면 내가 느끼는 것은 환경의 일부가 된 느낌이에요.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요."


2년 여전부터 내가 그림을 감상할 때 느끼는 감정과 상당히 유사했다. 어떠한 의도와 주제에 대해서 표현된 그림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없어지고 온전히 그 작품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그 내용에 취할 수 있다. 비록 내가 모든 걸 이해하고 바라볼 순 없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신경이 그 작품 하나에 온전히 집중되는 그 상태가 너무 좋다. 심지어 작품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다르기에 이 행위는 질리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나로부터 잠시 일탈해서 어디론가 여행 다녀오는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화가 또한 그리는 동안에는 그 주제, 생각, 관점에만 집중해서 작품을 완성하지 않나. 화가와 관객 모두가 그 자신들이 없이 오로지 어떤 메타인지와 개념에만 몰입되는 순간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생각의 연결 통로에서 서로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비단 그림만이 아니라, 그 어떤 예술 작품에도 공통적이다.


번외로 얼마전 책모임에서 알게된 타워님의 노자 <도덕경>에 대한 해석으로 "감정을 비워야 또 다른 감정이 들어올 수 있고, 감정을 비워야 집착에서 벗어나서 해탈이 경지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찌보면 이와도 연관이 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처럼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현대 사회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필수인 이유가 될 지도 모르겠다. 전시회 예약 플랫폼 기업 주식이라도 사둬야 할까......


영화를 보는 동안, 고흐가 참 외롭고, 핍박 받고, 고독한 삶이었구나 하는 걸 느꼈다. 본인이 생각하는대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에 담긴 메시지와 생각,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물며 제대로 감상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얼마나 외롭고 처량했을까? 아무리 많이 그려도, 나름의 의미를 담아내도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림이 이상하고 밑도 끝도 없이 아무거나 그린다고 놀림과 멸시까지 받아야 했고, 유일한 동료이자 친구인 고갱도 고흐의 그림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거기다가 예술가들에게 많이 있는 뮤즈 조차도 제대로 없었다. 동생 테오가 유일한 조력자이자 응원군이었을 뿐이다. 가난하기까지 해서 일상 생활이 안될 정도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버텨낸 것인 지 신기할 정도였다. 때로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 아니었을까? 사람으로써 화가로써 본인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조롱과 괄시를 받는다는 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고흐가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않기도 힘들었을 법하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뛰어넘는 그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부러웠다. 그처럼 하나에 인생을 모두 다 바칠 정도로 사랑할 게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림만 그리면 늘 행복할 수 있기에 힘듬이 힘듬이 아닐 수 있고 계속 견딜 수 있으며 결국엔 본인의 생각과 스타일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열정과 사랑인데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

.


고흐 : "편평한 풍경을 마주하면 내겐 영원만이 보인다. 나에게만 보이는 걸까? 존재엔 분명 이유가 있을텐데"


나는 원래 소설 작가가 되고자 했었다. 하지만 수입이 담보되지 않는 길이었다. (천재 고흐도 저렇게 고생을 죽을 지경으로 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안도의 한숨을 안 쉴 수 없다) 나는 작가이면서도 돈도 벌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생각하면서 동시에 내가 왜 소설 작가가 되고 싶은 건지 궁금했었다. 한참을 고민한 결과, 결국 소설이라는 것은 어떤 메시지를 그 안에 담는 행위고, 그것을 다양한 캐릭터와 스토리로써 독자에게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독자와 소통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하는 일의 본질이라는 결론에 다다렀다. 그러고 나니 나에게는 나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매개체만 있으면 소설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됐다. 자기 합리화의 흐름이 이렇게 될 줄은 당시의 나도 잘 몰랐다. (그러나 언젠가는 한 편 써보고 싶은 욕심은 아직도 존재한다) 하지만, 고흐는 자신만의 표현은 그림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그림으로서만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토록 궁핍했어도 고흐는 견뎠다. 그렇게 고흐에게만 보이는 것을 남겼다.


.

.

.


고갱 : "왜 늘 자연만 그리나"

고흐 : "바라볼 게 없으면 당황스러워. 바라볼 게 필요한데 자연엔 볼게 많잖아. 볼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해."

고갱 : "하지만 자네만의 걸 그려야지 베낄 필요 없잖아."

고흐 : "베끼는 게 아냐."

고갱 : "그래 하지만 왜 맘속에 있는 걸 안 그려? 생각나는 것들"

고흐 : "자연의 본질이 아름다움이니까"

......

고흐 : "난 자연을 보면 더 확실히 느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유대를, 가슴 떨리는 에너지가 신의 목소리로 들려와. 때론 너무 강렬해서 의식을 잃는다니까."

고갱 : "뭐래"

고흐 : "정말이야. 한참 지나서 깨어보면 어딘지, 뭘 했는지도 모르겠어. 내 이름을 기억하는데도 몇 분이 걸려."

고갱 : "이봐. 빈센트. 앞으로 그림도 달라질거야. 모델이나 자연을 바라볼 필요도 없어진다고. 왜 그런지 알아? 자연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뿐이거든. 우리 눈이 없다면 자연은 의미도 없어. 그 누구도 세상을 똑같이 바라보지 않아. 같은 풍경 앞에 앉아서도 같은 나무나 산을 보지 않는다고"

고흐 : "내 말이! 내가 그린 나무는 내거야"

고갱 : "자네가 그린 얼굴도 자네거고 자네 덕분에 영원해지지. 자네가 그렸기 때문에 유명해질 거고 자신들 때문이 아니라 자네 그림 덕분에"

고흐 : "듣기 좋네"

고갱 : "그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가지. 그 모델들 때문이 아니라고"

고흐 : "모델들이 다 내 그림을 좋아하진 않아"


.

.

.


고흐 : "제 자신에게 말하죠.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특권인 거죠. 희망과 위안을 주는 것."

의사 : "당신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자신과 그림을 혼동하고 있어요."

고흐 : "전 제 그림이에요."

의사 : "위안과 희망이라뇨? 사람들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네요."

고흐 : "제게 보이는걸 나누고 싶어요. 그들은 저처럼 보지 못하니까요."

의사 : "근데 왜요?"

고흐 : "제 시각이 세상의 현실과 더 가깝거든요. 사람들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살아있다는 느낌을요."


자연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보여지는 그대로 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한다. 그리고 그 해석을 유무형의 어떤 것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작가의 존재 이유다. 고흐는 자연을 바라볼 때, 그에게 보여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았다. 그의 관점이 독창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뒤늦게라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리라. 안타깝게도 고흐의 시대는 인상파가 일어서는 시대였고, 고흐의 시선과 해석은 생전에 대중적인 인기를 많이 얻진 못했다. 안타깝다.


.

.

.


이 영화는 연출적으로도 매번 장면마다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고갱이 고흐의 곁을 떠나고 나서 고흐가 그의 귀를 자르는 바람에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의 페이드-인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자화상을 바로 연상시키는데 충분했다. 고흐는 고갱이 떠나면서 계속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한 쪽 귀를 잘랐다. 그로 인해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그 시점부터 개인의 주관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본인을 부정당한다. 나는 이 부분이 참 마음 아팠다. 비록 대다수에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음이 비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비정상임을 받아들이는 고흐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생각해봤다. (심지어 고흐의 눈에는 보여지는 세상도 혼돈처럼 보여지는데......)


.

.

.


영화에서 고흐의 죽음에 대해서 동네 양아치들에게 살해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여러 기사를 검색한 결과, 감독은 죽기 직전 80일 동안 75점의 그림을 그렸던 고흐가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자살이 아닌 타살로 그렸다고 한다. 감독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된다. 죽음까지도 너무나 처량하다는 것이 이 화가에게 어울리는 걸까? 영화 초반에도 아이들에게 공격 받았었는데, 끝에서도 철없는 양아치들에게 공격을 받는 걸로 끝나는 걸 보니, 고흐는 죽을 때까지 외롭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보고 나서도 한동안 먹먹했다.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삶이어서 늘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연으로부터 위안을 받았을까? 아니면 안정적인 풍광속에서야 잠시 외로움을 잊고 그림에 빠져들었기에 계속해서 그렸을까? 올해 초에 갔던 전시회에서 본 고흐의 <론강의 별밤>을 오랜만에 다시 보면서 여운을 느껴본다.

작가의 이전글 스스로 이발을 해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