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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은 달 Jan 20. 2023

그때 그 염색

30일 쓰기


20대는 역시나 방황과 우울의 연속이었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명상하듯 염색을 해댔다. 돈이 궁색한 학생이기도 했고, 미용실은 시간적 제한이 있으니 언제나 장소는 집, 시술자는 나였다. 조용하고 은밀히 거사를 치르고자 했다. 그래봤자 자연갈색의 머리카락을 올블랙으로 새까맣게 변신하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귀를, 코를, 혀를 뚫고, 배꼽을 뚫고 그러다 지치면 머리색을 바꾸고, 눈동자색을 바꾸고 그렇게 내 몸에 취할 수 있는 갖가지 변화를 누렸다. 내가 처한 상황은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가했다. 타투까지는 용기가 부족했다. 한 발짝만 더 용기를 냈다면 지금쯤 내 몸은 온갖 타투로 뒤덮여 있을지도 모를 텐데, 조그마한 아쉬움이 남는다. 알 수 없는 불안과 방황의 해소방안을 그저 나의 신체에서만 찾은 어린 나에게는 유감이 남는다. 여튼, 그런 작은 노력들은 언젠가부터 끝이 났다. 몸을 덮은 장신구들은 덜어냈고, 염색은 더 이상 행하지 않았다. 가족들을 건사하기 바빴고 우울조차 사치인 것 같은 그런 날들이었다.  


대략 3년 전, 연고도 없는 동네로 이사 왔다. 유배온 듯 주위는 고요했고 집안은 전쟁통이었다. 어린 두 아이에 매몰된 나 자신에게 무언가 또 내적 변화가 필요했나 보다. 셀프염색을 결심했다. 그간 세월이 흘러 염색약 시장도 커졌고 그에 따라 검색의 범위도 넓어졌다. 인터넷을 한참 뒤져 갖가지 정보를 물색 끝에 구매를 결정했다. 그렇게 손에 넣은 염색약은 결국 포장도 뜯지 않고 그대로 집안 서랍장 어디에 고이 모셔두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 그때 그 염색을 결심했다. 높은 서랍장에 든 염색약을 까치발을 해서 꺼내 제일 먼저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2022년 9월 30일. 좋은 날이었네. 가을. 넉 달 전이구나. 버릴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무딘 나는 감행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 오랜 검색 끝에 고른 컬러가 무엇일지 궁금했달까.


몸이 기억하는 염색의 기술은 여전하다. 욕실에서 드라마 한 편을 틀어놓고, 거울을 보며 여유롭게 약을 골고루 펴 바른 후, 조금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따뜻한 물에 약을 씻어낸다. 샴푸로 두피에 남아있는 약을 꼼꼼히 제거한다. 끝이다. 별색 아니었네. 바깥에 나가 보아야 자세히 알겠지만, 그저 톤 다운된 짙은 갈색이랄까. 궁금함에 염색약을 검색해 본다. 밀본 네오빈티지 그레이 8-nGR. 그때의 나는 네오하고 빈티지한 그레이 컬러를 원했구나. 조금 이따 햇빛이 쏟아지는 밖으로 나가 다시 살펴보아야겠다.  


중요한 건 머리색이 아닐 테지만 어떤 날은 또 꽤 유의미 있는 일이 되기도 한다. 머리털 색을 바꾸는 게 뭐 대수일까 의문이지만 때로는 그런 소소한 재미가 삶의 구멍을 메우는 완충제가 될 수도 있으니.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일수도.





#알고보니밝은색이잘어울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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