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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Feb 08. 2024

두 렙돈 과부 이야기의 반전

헌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니

묵상 나눔 막 12:35-44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물음표가 생기는 구절들이 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이 그렇다.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리는 장면. 이 장면에서는 언제나 물음표가 최소한 3개는 붙었다. 아니, 생활비를 다 드리면 이 과부는 무엇을 먹고사나? 당시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라고 여겨지던 과부인데 생활비까지 없으면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당장 다음 끼니의 생활비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헌신인가?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을까 파악이 잘 되지 않았던 구절이었다.


하지만 이 본문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접하게 되었고 그제야 무릎을 치며 예수님이 의도를 깨달았다. 핵심은 이 본문 앞뒤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과부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상황을 정리해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제사장, 서기관 및 장로들에게 계속 도전을 받고 계신 상황이다. 니가 무슨 권세로 이러냐, 세금은? 부활은? 최고 짱짱 율법은? 등등 열심히 예수님 앞에서 말로 쉐도우 복싱 중인 이들과 대치하는 중 일어난 사건이다.


성경이 처음 기록될 당시 오늘과 같이 장, 절로 나누어지지 않고 두루마리에 연속하여 기록되었다 (장절은 1955년에 인쇄업자 스페타누스가 나누었다고 함). 따라서 마가복은 12장은 오늘 구절로 끝이 났지만 실제 문맥을 보면 다음 13장까지 연속해서 읽어야 한다. 병행본문인 누가복음 또한 20장과 21장을 연속해서 읽어야 한다. 누가복음을 두루마리 보듯이 한 번에 보면 다음과 같다: (눅20:45-21:6, 개역한글본)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5-47)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1-6)


그러니까 오늘 분문의 문맥을 되짚어 보면: 

1.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 

2.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과부

3. 그런 헌금으로 지어진 성전이 다 무너지리라는 말씀이다. 


즉, 이 본문의 핵심은 과부의 헌신이 아닌 과부까지 희생시키는 종교지도자들의 욕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과부는 분명 자발적으로 헌금을 했을 것이고 그 믿음의 헌신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헌금에 대한 칭찬보다는 착취에 대한 한탄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는 해석인 것 같다. 왜냐하면 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떡 한 덩이를 뺏어 먹은(?) 엘리야의 케이스에서는 후에 그 과부가 넘치도록 받았다는 해피엔딩을 말씀에서 명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왕상 17:8-15). 그와는 달리 오늘 본문은 과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침묵한다.


비행기 안에서 위 묵상을 한창 쓰던 중 앞사람이 갑자기 자리를 뒤로 쭉 땡겨서 노트북이 확 접혀버렸다. 접히지 않았다면 노트북이 껴서 깨질 뻔했던 위험한 순간이었다. 순간 짜증이 났지만 노트북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내 자리를 뒤로 젖히려 했지만 자리가 젖혀지지가 않는다. 보니까 내 뒤 사람이 태블릿으로 영화를 보고 있고 태블릿으로 자리가 뒤로 넘어가는 걸 막고 있다. 난 중간에 낀 것이다. 내가 뒤로 젖혀도 되겠냐고 하니까 못 알아들었는지(아니면 모른 척하는지) 고개만 도리도리 한다. 하아..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웅크린 상태로 다시 노트북으로 돌아오니 이런, 나는 거룩한 말씀을 묵상 중이었구나..!


내 삶이 괜찮을 때 고상한 묵상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진짜는 괜찮지 않을 때 나오는 것 같다. 말씀 묵상에 골몰하다가도 고작 중간에 낀 것에 분노하는 나의 하찮음을 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으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위선. 위선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지금, 순간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점검하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종교지도자들의 탐욕과 무자비함을 욕하지만 동일한 씨앗이 마음속에도 있으니 이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순간 하나님 앞에서 동기를 점검해야 함을 말씀하신다. 내가 잘 못 알아먹으니 시청각 자료를 동반하신 것이다.


그리고, 두 렙돈을 다 내어버린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 같다. 착취당한 것을 알았다면 너가 그 빈자리를 채우라고 하시는 것 같다. 사실 이러한 마음을 예전부터 주시지만 아직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 기부나 헌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고 기도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해야 할지는 알지 못한다. 기도가운데 인도하심을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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