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림두두 Nov 11. 2022

51,000원어치의 대화

안정제일주의 남자와 꿈 많은 여자의 대화

아침부터 차 빼달라는 전화에 잠옷 바람으로 내려갔더니 주차장에 휘황찬란한 천막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3년만에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오늘 같은 날은 외식 좀 해줘야지. 뭐 대단한거 먹는 것도 아닌데 남편 퇴근시간만 기다렸네. 

아이와 셋이서 밥을 먹다가 아이는 친구의 연락에 뛰쳐 나가고 둘이 남았다. 이상하게 밖에서 아이가 있다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면 순간적으로 (약간의) 어색한 공기가 훅하고 들어온다. 집에서 둘이 있는 것과는 좀 다른. 결혼 10년차쯤 된 부부들은 어떤건지 아시려나…(남편과 사이는 좋다. 사이와는 관계 없이 말이다) 말 없이 먹기만 하다가 남편이 입을 뗀다.


“히키코모리나 백수가 되는 이유가 1차적 욕구를 참지 못해서래.”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뭐람. 그러니까 본인이 되고 싶은 건 1차적 욕구를 참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뭐 이쯤 되면 그게 장래희망쯤 되는 건가 싶다. 내가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그가 자주 말하는 것이다.


그러자 어제 달리기를 하면서 들은 여둘톡 주제가 생각났다. 

부자로 사는 법이라는 주제였는데, 부자가 된다면 어떻게 살고 싶냐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니까 돈이 많으면 어떻게 살 거냐는 것이었다. 나는 돈을 버는 것과 상관없는 생산적인 일을 맘껏 하고 싶다고 한 반면에 그는 그냥 완벽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정말 우린 다른 인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우리 집 가계 수입의 대장님이시다. 그는 내년에는 정말 돈 되는 일들만 잔뜩 할 거라고 했다. 하루빨리 누워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 부지런히 돈을 벌고 싶은 게 그다.


그렇다면 나는? 글쎄. 

미래를 꿈꾸고 싶지 않은 요즘이다. 나에게 당장 지금 필요한 것이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래의 내가 거지가 될까 봐 겁이 났다. 모두가 집이 있는데, 우리만 집이 없어서 거지가 될까 봐, 주변인들의 가게가 다 잘되는데 직원으로 일하는 나 혼자 거지가 될까 봐.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미래를 내다보고 살아 본 적이 없었기에, 하루하루가 불행하고 스스로가 이렇게나 지질할 수 있을까 싶어 괴로웠다. 이런 젠장. 나중에는 거지가 될 거라는 불안보다 나의 지질함에 질려버렸다.

집은 정체되며 하락장을 맞이하면서 몰아치는 불안이 덜해졌고, 가게는 관두면서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면서 괜찮아졌다. 그러면 난 앞으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10개월이 됐는데도 글쎄다. 아직도 모르겠다.


남편이라는 이 남자, 평소엔 늘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나를 응원해주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망치로 머리통을 한 대씩 내리쳐준다. 정신 차리라고. 관두고 나면 잠깐 허우적대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허우적대는 것 같다는 그의 말에 갈비뼈가 근질근질하다 쑤신다.  하고 싶었던 것들은 얼추 다 해본 것 같다.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림이냐, 음식이냐이다.


사실 답은 나와있다. 나는 가게를 차리고 싶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가게. 

쌀쌀해지는 계절엔 수프와 스튜를 내놓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엄마 김치도 팔고 싶다. 하지만 들어가는 월세며 비용들이며, 이미 맛본 요식업이란 환상 따윈 없으며 노동이 100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점에 머뭇대게 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 저질러야 한다는 말이 맞다. 나는 그걸 육아 하나만 해봤네…. 

그나저나 나에게는 가장 큰 장벽이 있다. 돌다리를 두드리고~ 두드리고~ 두드리고~ 부서질 때까지 두드리기만 하는 나의 투자자 남편. 그러다 부서지면 이 길은 아니네하고 돌아설 인간 (에라 잇)


본인에게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그는 주변에서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음 싶은 사람이다. 그 주변은 날 말하는 거겠지. 투자 비용이 들어가는 가게를 차리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가게라 함은 전혀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 명확히 하고 싶은걸 정해 오란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거. 그게 명확한 건데…


기술과 시간만 있으면 돈 벌 수 있는 그림 일과 기술, 노동력, 월세, 재료비 등등 다 투입되어 돈 벌 수 있는 음식 중 그는 그림을 선호한다. 뭐 이야기만 하면 그거 그림 몇 장만 그리면 벌 수 있는 건데~라고 한다. 어쩌라고. 죽기 전에 한 번은 하고 싶단 말이다. 내 가게.


늘 잘되는 상상하는 나에게 그는 최악을 생각해야된다고 알려줬다. 아, 최악의 최악까지 가보까 한번. 가게가 망하고 개복치 남편은 앓아 눕고 가정의 평화가 깨진다까지 간다. 내가 최악을 생각하면 이 정도야. 

내 남편이 얼마나 개복치냐면… 얼마전 출간 제의가 들어왔다. 남편이 그리는 인스타툰을 기반으로 한 그림 에세이였는데, 여기서 부족한 스토리는 내 글을 기반으로 남편이 그림을 그리자는 제의였다. 그 자리에서 하고 싶어 호들갑 떨며 남편을 꼭 설득하겠다고 큰소리 뻥뻥쳤다. 나의 확신과 달리 남편은 고민하는 3주동안(오래도 고민했다) 아주 앓아 누웠다. 그 동안 우리는 몇번 싸웠고, 책을 진행할 것을 생각하니 상상 속에서 우린 이혼까지 했다ㅋㅋㅋㅋㅋㅋ결국 책 제의는 거절했다. 명예와 약간의 돈보다 가정의 평화를 택했다. 가게를 하고 싶은건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이유다. 



남편이 큰 결심을 한 듯 말했다.

“네가 잘하는 거 말해줘 봐?”


늘 잘하는 게 많다고 주변인들에게 우쭈쭈 받는 나는 내 얄팍한 밑천이 드러날까 봐 늘 조마조마하다. 이거 찔끔 저거 찔끔한 게 들통날까 봐. 근데 이 인간은 나의 밑천을 아는 인간이니까 궁금하다. 그래 말해 보아라.


“일단 요리. 근데 이건 장사랑은 별개야? (당장 한다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겠지) 그리고 공간. 이건 좀 많이 인정. 신기하게 이게 어울리겠어? 싶어도 결국 어울려. 신기하게.”


어이가 없다. 그림은 없지 않은가. 가게는 하지 말라고 하니까 다른 걸 말해본다.

“그럼 에어비앤비를 해서 조식을 내어주면 되겠다!!!! 그렇지”


이렇듯 막무가내인 나와 안정주의의 그가 만나 이 정도로 살아온 거라는 걸 나도 안다. 

언제 할 말이 없었냐는 듯 두 시간을 열띤 토론인지 뭔지를 하고 남편이 이제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순대곱창볶음, 파전, 국수 이렇게 다해서 51000원. 드럽게도 비싸다. 잠시 집에서 밥 해 먹을걸 그랬다 싶었지만, 그래도 51000원 이상의 대화이지 않았을까. 수확은 없지만.



늘 그가 하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

그거 그렇게 쓰라고 한 말이 아닐 텐데, 굳건하게 자기 식으로 써먹는 말이다.

안정제일주의,평화주의자 남편과 꿈이 많고 냅다 저지르기 좋아하는 여자. 결국 누가 이기려나.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잘살아온건 남편 덕분이라고 감사 인사를 전해본다. (수습)

매거진의 이전글 김치 꿈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