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향유하는 여유로움의 출처는 어디일까
내가 머물렀던 캠룹스(Kamloops)라는 지역은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주(British Columbia)에 위치해있다. 캐나다에서 번화된 도시로 손꼽히는 밴쿠버에서 버스로는 5시간, 비행기로는 1시간 반 가량 소요되는 캠룹스는 번화되지 않은 작은 타운이다. 이곳에 위치한 단 하나의 대학교, 톰슨 리버스 대학에서 나는 4주 간 학생으로서 지냈다. 어느 주말에는 홀로 밴쿠버와 빅토리아 여행을 하기도 했다. 약 한 달간 여러 캐나다인들, 또는 캐나다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여유롭고 배려있는 태도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라이프스타일에서 묻어 나오는 삶의 여유가 타인을 대하는 생활태도로서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중 내가 경험한 몇 가지 특이점을 통해 그들의 습관들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근데 나 너 처음 봐.
적응하는데 며칠이 걸렸지만 내가 캐나다에서 했던 가장 좋아하는 행동 중 하나이다. 지나가다가 누군가와 어색하게 눈을 마주친 순간,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쿨하게 지나친다. 왠지 모르게 나는 미소를 주고받을 때 항상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만약 한국에서 처음 보는 누군가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면 쟤가 나 좋아하는 줄 알거나, 이상한 사람일 시에는 최대한 눈을 피하기 위해 허공을 응시하거나 괜히 휴대폰을 확인했을 것이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습관이 되어 며칠간 미소를 지으며 다녔는데, 한국에서는 이 행동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한국인들은 좀 무표정하게 다니는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엄마와 함께 나눈 적이 있는데 대화를 통해 그 이유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은 인구가 너무 많아서 자주 부딪히니까 서로한테 질려서 그렇고, 반면 캐나다에서는 사람이 귀하니까 아무리 도시더라도 누군가를 만나면 가볍게 안부를 묻는 문화가 생긴 것이라는 결론. 조사해보니 캐나다의 땅 면적은 한국보다 약 100배 크지만, 인구는 한국이 약 1.5배가량 더 많다는 정보를 얻고서 꽤 신빙성 있는 추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에 비해 땅이 넓어서 그런 걸까? 캐나다에서는 번화한 길에서든 대중교통에서든 어느 정도 개인 공간의 넉넉함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와 부딪히거나 그럴 '뻔' 하더라도 항상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최근 한국 거리를 돌아다니며 단박에 느낀 차이점 중 하나는, 한국인들은 주변 사람들 정말 잘 치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고 미안하다는 소리도 잘 안 한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부딪히는 것 외에도, 가끔 몇몇 한국인들은 누군가를 진짜 빤-히 쳐다볼 때가 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의 경우 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타인의 사적인 공간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반면 캐나다에서는 정말 누구도 서로에게 신경을 안 쓴다. 남을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는 행동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는 또 다른 배려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뭘 입었는지, 무슨 인종인지, 장애여부가 있는지, 뭐든지 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관대하고 다양성이 수용된다. 그걸 그냥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느낄 수 있다.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다양한 사람이 섞인 공간 속에서도 굉장히 편안한 느낌. 한국에서는 분명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앞에 언급했던 다양성에 대해 편안한 느낌을 겪었던 순간에 대해 몇 가지 경험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솔직히 한국에서는 신체적으로 불편한 장애인이 다니기에 아주 어려움이 많다. 대중교통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나이가 지긋하거나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조차 대중교통에서 배려받기 여의치 않은데 말이다. 캐나다에서 겪은 감명 깊었던 일 중 하나는 몸이 불편한 사람이 버스를 탔을 시에 사회적 룰로써 그들을 위해 30초에서 1분 이상의 시간을 내어 준다는 것이다. 버스기사는 물론 승객들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암묵적 룰을 따른다.
다른 예로써, 유모차를 가지고 버스를 탑승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 적이 있다. 그들이 탈 때마다 버스기사와 승객들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배려있는 행동을 하였다. 버스에 타고, 유모차의 주인이 자리를 잡고, 유모차 브레이크를 밟을 때까지, 브레이크를 확인했다는 유모차 주인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버스기사는 출발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리고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한 승객들의 행동이 정말 감명 깊었다.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장담하건대 이 행동은 캐나다 시민들 사이에서의 규칙으로 자리 잡은 행동인 것 같다. 만약 한국의 대중교통이었다면 민망하리만치 끝까지 그들을 쳐다보았을 테고 유모차 주인의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끝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뭐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말이다.
캐나다에서는 어딜 가든 세대 간 소통이 더 편안하게 이루어진다고 느껴졌다. 어딜 가도 할머니 할아버지 나이 때의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논다. 쇼핑몰이든, 공원이든, 바닷가든 말이다. 그 모습이 아주 예뻐 보였다. 이렇게 세대를 가로질러 함께 존재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이 아주 부럽게 느껴졌다. 이는 아마도 언어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을 테다.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에는 존댓말이 있고, 고작 한 두 살만으로도 언니, 오빠, 형, 누나의 신분(status)이 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세대 간의 통합이 쉬울 수 있을까. 뿌리 깊은 유교사상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이는 분명 베이비붐 그 이상 세대와 밀레니얼 그 이하 세대 사이에 장벽으로 존재한다.
앞서 나열한 네 가지 특징을 아우르는 특징은 아마도 여유로움일 테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들의 여유가 나오는 걸까 생각을 해보았다. 첫 번째로는 남을 신경 쓰지 않는 문화가 있다. 남들이 뭘 하든, 따라 하거나 쫓기면서 하는 법이 없다. 나와 남이 다르다는 인식으로 자유로워지면 그것이 곧 융통성이 되어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다양성이 존중되는 문화가 있다. 이러한 문회에서는 누구도 '너는 왜 남들과 똑같지 않냐'는 메시지의 눈초리를 건네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학교든 직장이든 세시 반이면 대부분 마친다는 점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오후 시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시간을 사용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 아이는 교실에서 벗어나 뛰어놀 수 있고, 어른은 책을 읽거나 한적하게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인간성을 돋아나게 한다.
사회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항상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게 된다. 요즘 한국에서는 5살 아이부터 학원 교육을 한다고 한다. 결코 아이가 원해서 배우는 것은 아닐 테다. 사회에서 그렇게 하길 원하기 때문이고, 근처 또래 아이가 벌써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한국은 남들과 같지 않아서 안달이 났을까? 어른들의 상상력 부재는 우리 자신을, 곧 자라나는 아이들을 병들게 할 것이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 어느 정도 쓸데없다는 걸 인정하는 어른들이 만약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다양함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첫 열쇠는 어른들 스스로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라온 세월에 깊이 박힌 무의식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만으로 바뀔 수 있다. 그 무의식이 우리를 협소한 상태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스펀지같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곧 더 나은 시민의식을 야기할 것이며 결국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캐나다에서의 멋진 시민의식을 경험한 후, 나는 국가 발전 정도가 절대 기술발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아무리 나라가 기술적으로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이 그에 걸맞게 발전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굳게 믿는다. 사회적인 시스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개개인이 스스로의 삶에 상상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