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해서, 다른 것들과는 달라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요연하다.
실로 장난감 밭이다. 수납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갖가지 로봇과 인형, 여러 종류의 블럭, 주방놀이 소품, 퍼즐 조각, 보드게임, 공룡,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보내오는 교구들까지. 심지어 아이들 방을 거쳐서 거실 한켠에까지 삐져나와 있는 장난감들을 보고 있노라면 수능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고3 수험생처럼 막막함이 밀려온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닐 터인데, 하나 둘씩 차곡차곡 쌓여온 장난감들이 이젠 손을 쓸 수도 없이 한데 뭉쳐져 있다. 종류별로 분류를 한다고는 했으나, 아이들이 갖고 놀면서 점차 섞이게 되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커다란 대용량 수납함에 이것저것 '몽땅 때려넣는' 형식의 정리가 일상이 되었다. 특정한 '무엇'이 특정한 '어디'에 있는지 여부는 아주 특별한 장난감이 아니고서는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젠,
그 무시무시한 대용량 수납함이 무려 여러 개다.
버린 건 아니지만 버려진 것처럼 아이의 손이 가지 않는 처박힌 장난감들. 이제 그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하기 시작한다.
흡사 '초심으로 돌아가기' 같다. 블럭은 블럭끼리, 자동차는 자동차끼리, 주방놀이는 주방놀이끼리, 종류별로 분류한다. 그리고 부서졌거나 갖고 놀지 않을 것 같은 장난감들은 미련없이 플라스틱 재활용 함에 넣는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정리. 몇 년 동안 참 많이도 사주고 많이도 물려받았다.
세상에, 이게 여기 있었구나.
수납함의 저 밑바닥에는 몇 년 전 아이들이 지겹도록 갖고 놀던 애착 장난감이 있다. 첫 아이가 세 살 무렵 징하게 갖고 다니던 작은 레고 자동차다. 둘째가 애지중지하던 아기 인형의 젖병도 여기 있다. 찾으려면 죽어라고 못찾겠던 그것들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마음껏 갖고 놀아지다 제자리를 못 찾고 대형 수납함(이라 쓰고 장난감들의 무덤이라 읽는다)으로 어찌저찌 굴러들어 온 모양이다. 이렇게 꼭꼭 숨어 있었으니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두 녀석들 모두 밖에서건 집안에서건 장난감이나 인형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을 여전히 좋아한다. 그러다 분실하고, 찾아달라 조른다. 그런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불변의 법칙을 깨달았다.
자주 갖고 노는 것은 늘 없어진다.
왜냐하면 자주 갖고 놀기 때문이다.
궤변같지만 사실이다.
어디든 갖고 다니므로, 결국 어디에서든 놓고 오기 쉽다.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장난감들은 오히려 늘 그 자리에 있어 찾기 쉽지만, 애정의 깊이가 깊은 물건일수록 분실하여 찾지 못하는 빈도가 잦다. 아이의 애착인형을 찾고 있다는 애타는 소식들이 자주 들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도 그러하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잃기가 더 쉽다.
너무 친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인연끼리 등에 비수를 꽂는 경우도 많다. 소중히 여기던 옛 연인들은 오히려 친구로 남았던 사이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 결국은 잃게 된다. 차라리 적당한 수준의 애정이 더 오래 남곤 한다. 그닥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잃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어렵다.
아이들의 과거 애착 장난감들을 수납함 구석에서 꺼내 제 자리에 진열하면서 생각한다.
애들이 이걸 보면 이젠 세월이 흘러 전처럼 애지중지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반가워는 하겠지.
이젠 또 다른 소중한 것이 생겨 그 때 같은 의미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시절을 추억 정도는 하겠지.
그리고,
아이들의 소중했던 물건들을 찾으며
내가 잃은 소중했던 것들을 조용히 떠올려본다.
내 안의 어딘가쯤에는 처박혀 있을
'소중했던 잃은 것들'.
누구나 그렇게 하나 둘 잃으며 사는 거겠지.
2018년 9월,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