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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Aug 09. 2018

괜찮아.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겠어.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2시 10분이다. 

둘째보다 먼저 하원하는 첫 아이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기 1시간 전.


아이들이 집에 없는 조용한 시간, 쉬고만 있던 것 같지는 않았는데 또한 그 어떤 것도 완성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든다. 해도 해도 티 안나는 집안일은 디폴트다. 그 위에 얹혀지는 새로운 과업들이 나를 괴롭힌다. 몸뚱아리는 게으르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매일 작성하는 다이어리(라고 쓰고, 낙서장이라 읽는다)를 펼쳐본다. 어젯밤에 적어놓은 '오늘의 할일' 체크리스트가 희번뜩거린다.


8/7(화)

1. 기타 케이스 주문 (기존에 있던 케이스에 곰팡이가 생겼다)
2. 엄마차 자동차보험 홈페이지에 주행거리 인증사진 업로드 (주행거리에 따라 1년 후 할인혜택 때문)
3. 수영장에서 쓸 스포츠 타올 검색 (일반 수건 대비 어떤 점이 좋은지)
4. 어린이집 8월분 특활비 송금 
5. 오빠 썬크림 주문


근데 그냥 오늘은 오전에 수영장 갔다와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날씨는 덥고 2주간의 여름방학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기에. 고요함을 즐기며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다. 무위의 시간이랄까.






괜찮아. 그래도 돼.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스페셜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생일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등하원을 챙기는 대신 쫙 빼입고 그럴싸한 파티장에 갈 수도 없고, 어디 '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까운 곳'으로 3박 4일로 나홀로 여행을 떠날 수는 더더욱 없다. 근데 더 중요한 건, 진짜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 결혼하지 않았을 아가씨 시절과는 또다른 느낌의 생일.



오히려 더 좋다.

이번에도 우리 신랑이 제일 먼저 내 생일 축하한다고 얘기해 줬으니까.

꼬꼬마 내 강아지들이 아침에만도 수차례 엄마 생일 축하한다고 안아줬으니까.


대단한 이벤트도 엄청난 깜짝쇼보다도,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할 신랑과 함께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가게에 가기로 한 저녁 약속이 더 기다려지는 행복한 젊줌마. ('젊'의 기준은 내 마음속에 있는 거니까 양심없다 하지 말아주시길)



저 체크리스트는 내일 날짜에 똑같이 써놔야겠다. 오늘은 아이들이 잠들어도 저 일들을 하지 않고 신랑과 미스터 션샤인을 다시보기 할거야.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2018년 8월 7일

그래도, 개미 눈물만큼은 설레는 생일날,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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